책과 더불어 살기/밑줄 긋기

[벌거벗은 지금] 다시 읽기

종이-배 2017. 11. 21. 07:16

[벌거벗은  지금] - 리처드 로어 신부가 말하는 그냥 바라보기

 

리처드 로어/ 이현주 옮김/ 바오로딸 / 2017

 

 

2017. 11. 21. <머리말>

 

-나는 사람들의 앎에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 언어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and or)'으로 갈라놓았지만 내 삶의 경험은 언제나 '이것도 저것도(both-and)'였다.(10)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허물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실패, 범죄, 몰락, 그리고 그늘진 행위들은 우리가 허용하기만 하면 모두 훌륭한 교사들이다. ... 모든 말(saying)이 말 없음(unsaying)으로 균형을 이루고, 앎은 모름으로 겸손해져야 한다.(12)

 

-모든 빛이 어둠에 의해, 모든 성공이 고통에 의해 채워져야(informed) 한다. 그것을 십자가의 성요한은 밝은 어둠이라 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파스카 신비 또는 불가피한 과월절이라 하였고, 가톨릭은 성체성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로 선포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심원리로 자리 잡는 일은 매우 드물다.(13)

 

-'현재 순간의 성사(聖事, sacrament)'를 벌거벗은 지금에 살아내야만, 우리는 경험이 좋든 나쁘든 추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그를 통해 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 순간을 어김없이 나눠놓고, 순수 현존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당신이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참된 현존(Real Presence)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진실임을 당신에게 약속한다. 그것은 거의 그토록 간단한 것이다.(13)

 

11. 22.

<이미 받은 선물>

 

-미래는 어쨌거나 늘 두렵기 마련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미래에 대하여, 마음속으로나마 여러 가지 방어벽을 쌓으려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그에 대한 준비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 참된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신과 하나 됨unity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게 아니다. 그것이 나를 발견한 것이다.(17)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달리 무질서와 불완전함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점이다.(18)

 

-모든 위대한 영혼의 관심사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마태 23,23)에 흥미를 가지는 대신 시시한 것들로 만족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19)

 

-성숙한 초월은, 제임스 앨리슨이 말한 대로 하느님 '안으로 떨어져' 하느님을 '겪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하시고"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를 받을 때의 마리아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처럼, 그 일이 우리한테서 일어나게 해드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20)

 

-우리가 한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뭔가가 우리한테서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알 따름이다. 우리는 친절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붙잡히고, 동시에 두려운 신비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를 묻는다.(21)

 

-"그대는 그대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대를 발견한다."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말처럼(22)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린다는 뜻이다.(23)

 

-성령을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로 '믿으려' 하지 말라. 그 대신, 당신 안에 있는 깊은 샘물을 길어 올려라. 그러면 저절로 믿어질 것이다.(24)

 

- 동시에 이미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을 '잃어버리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 당신은 타고난 권리를 모를 수 있다. ... 우리가 '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이 아마 그런 사람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가 누군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사람, 자신의 타고난 존엄성과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죄인'이다.(24)

 

-선물은 분명 우리 안에 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그것을 갈망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 당신은 당신이 빛 속에서 경험한 것을 어둠 속에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25)

 

-기도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신심행위도 아니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도 아니다.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연습하는 것이다. ... 나는 이 책에서 이 새로운 방식의 앎을 '관상' '비이원적 사유' 또는 '제3의 눈으로 봄'이라고 부르겠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보다 보면, 당신은 완벽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염려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은 명사보다는 동사요, 결론보다는 과정이요, 관념보다는 인격적 관계다. 당신과 함께 춤추는 완벽한 파트너가 있다. 그러니 당신은 실수할까 봐 겁내지 않아도 된다.(26)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하여 기도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관(管)이요, 악기요, 소리굽쇠다.(로마 8,26-27) 모든 영성생활의 핵심은 우리 안엥서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신 하느님께 '협력하는'(로마 8,28)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실제로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먼저 움직이시지 않는 한, 그 어떤 좋은 일도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첫째 움직임을 보완하는 둘째 움직임일 따름이다.(27)

 

11. 26.

<발음되지 않는 이름>

 

- 본디 그것은 입술과 혀로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코로 '숨 쉬어지는breathed' 이름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신성한 자음의 정확한 발음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를 그대로 시늉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매 순간 하는 일이 하느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맨 처음 한 일이 그분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고,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그분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는 얘기다!(29)

 

- 호흡에는 유다교식, 이슬람교식, 그리스도교식 호흡이 없다. 아메리카 호흡, 아프리카 호흡, 아시아 호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가난뱅이 호흡도 없고 부자 호흡도 없다. ... 지구의 공기는 하나고, 어디에서나 같은 공기가. 하느님의 바람은 어디든지 "불고 싶은 데로"(요한3,8) 부는데, 가지 않는 곳이 없고 따로 가는 곳이 없다. 어느 인간도, 어느 종교도, 이 '영'을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느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고 있는 호흡처럼, 가까이 있고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30)

 

- "네 숨과 함께 있으면서 숨에 마음을 모아라." 그 숨은 하느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창세 2,7) 바로 그 숨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으로 거둔(요한 19,30) 바로 그 숨이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을 향하여 평화와 용서와 성령으로 내쉬신 바로 그 숨(20,22-23)이다.(31)

 

11. 27.

<지는 해를 보는 세 가지 방법>

 

-신비가들은 제1의 눈과 제2의 눈으로 세상을 보되, 그 너머에 눈길이 닿는다. 어떤 신기한 '동시성'에 의하여 가슴 공간과 머리 공간과 신체의 깨어남이 자연발생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열릴 때, 그 일이 일어난다. 나는 그것을 '지금 여기 있음'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만유가 안에서 깊이 연결되는 순간으로 경험되며, 당신을 황홀함으로 이끌어, 심오한 기쁨과 심오한 슬픔이 함께 담겨 있는 '벌거벗은 지금'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당신은 시를 쓰고 싶거나 기도하고 싶거나 아니면 깊은 침묵에 잠기고 싶어진다.(34)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유가 이 세상 모든 불평과 폭력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35)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신비가'라는 말에 주눅들 것 없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 체계 또는 소속 체계에서 실재하는 내적 체험으로 옮겨간 사람을 뜻하는 말일 따름이다. ... 어떤 사람은 이 옮겨감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어떤 사람은 '깨달은enlightenment'이라고, 어떤 사람은 '변화transrormationn'이라고, 어떤 사람은 '성화holiness'라고 부른다.(36)

 

-다만, 누구든지 자기가 가본 데까지만 남을 데려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차츰 알게 되겠지만, 변화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 ...영적 체험 없는 신학 수업은 죽은 것이다.(37)

 

11. 30.

<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는 우리>

 

-내 버릇 가운데 다른 무엇보다도 '전부 아니면 전부all or nothing'라고 생각하는 것이 수많은 오류와 그릇된 판단으로 자신과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랑을 거역하고 상황을 잘못 해석하게 만들었다.(40)

 

-한 걸음 물러나,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를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용히 응시하는 능력은 우리가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바탕이다.(40)

 

-관상은 다른 쪽 실체를 볼 수 있도록 가슴과 머리 공간을 충분히 열어두는 수련이다. 그것은 '벌거벗은 지금'에 만족하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미래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자신과 대상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지식보다 먼저요 더 소중하다. 달라이 라마가 말했듯이, "마음의 변화는 언제나 생각의 변화다." 거꾸로, "생각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보려면 이 '둘'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43)

 

-예수는 서양 최초의 비이원적 스승이었다. 우리가 그분의 많은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그대로 따르지 못한 이유는 그것을 이원론에 찌든 머리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43)

 

<수도승들의 교훈>

 

 

'책과 더불어 살기 > 밑줄 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르면 다를수록  (0) 2018.01.07
가장 단순한 것의 힘  (0) 2018.01.06
[상냥하게 살기] 중에서  (0) 2017.11.04
[교육 통념 깨기] 중에서  (0) 2017.11.04
<제자로 산다는 것> 중에서  (0) 201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