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살이 31

또 욕을 얻어먹었다

또 욕을 먹었다. 그것도 아이들 앞에서. 사실 맨날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욕을 먹을 때 늘 아이들 앞에서 먹기는 하지만. 엊그제 일이다. 백로 절기를 맞아 아이들과 함께 만든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로 나들이를 갔다. 허수아비를 세우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고, 관평천 주변을 놀면서 가느라 12단지 놀이터에 도착한 건 11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놀이터에는 우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마냥 놀이기구에 올라가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그네를 타기도 하고, 나랑 마주앉아서 끝말잇기도 하고, 그러면서 놀았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한 아이가 와서 물었다. "종이배! 너무 더워. 마스크 벗어도 돼?" 나는 놀이터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고..

엄마 아빠 성토대회

"얘들아, 내일부터 사흘동안 쉬는 날이야. 엄마 아빠랑 재미있게 잘 지내." 각자 하는 역할은 달라도, 교사도 아이들도 '출근하는 마음'으로 온다. 매일 씩씩하게 등원하던 이이가 가끔 엄마 아빠와 헤어지지 못하고 눈물바람을 일으키거나, 치맛자락을 놓치 못하면 교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나도 출근하기 싫을 때가 많은데, 너도 그런가 보구나.' 그래서 어린이집 생활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교사나 아이들이나 '빨간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같다. 더욱이 연휴나 휴가가 길게 이어질 때는 "이제 몇 밤 동안 안 오는 거야."라고 말해주곤 하는데, 그럴 때 아이들의 반응은 주로 "아싸아~!"다. 그런데 오늘은 반응이 좀 달랐다. 한 아이가 한숨을 푹 쉬면서 "난 싫어. 우리 엄만 또 '방구석 일열'(텔레비전..

발랄이가 해준 실종유괴예방교육

'발랄이'가 돌아왔다. 어제 집 앞에서 다시 만난 발랄이, 얼마나 반갑던지! 발랄이는 작년쯤 우리집 지하 스튜디오 앞에서 태어나, 이듬해인 지난 부활절에 우리집 베란다에서 처음으로 몸을 풀고 새끼 네 마리를 낳은 암컷 길냥이다. 사람을 별로 개의치 않고 뛰어다녀서 '똥꼬발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가, 줄여서 '발랄이'라고 부른다. 이 녀석이 네 마리 새끼를 낳았을 때, 우리 부부는 산부인과 신생아실 앞에서 손주손녀 들여다보는 할애비, 할매 같았다. 밥도 그 앞에서 먹고, 고물고물거리는 녀석들 보고 싶어서 퇴근을 서둘렀던. 그런데 어느날, 해질녘 빛이 강하게 드는 베란다가 더웠는지, 발랄이는 새끼들을 다 데리고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옆집 계단참 밑, 시원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기만 우리집을 들락..

한여름, 나들이 길에서

한여름이다. 배롱나무 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목수국의 하얀꽃도 갓 지은 밥처럼 소복해지고 있다. 매미가 우는 소리도 커졌다. 아이들은 "숲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파아란 저 하늘이 더 파래지고,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손뼉치기를 한다. 나들이를 나가면 매미들이 벗어놓은 허물을 찾느라 눈길이 바쁘다. 어느 핸가, 매미 허물을 찾고 싶어하는데 그만큼 갯수가 되지 않아서 가져가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통신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고, 여름과 겨울에 한차례씩 오프라인 연수를 가야 했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중에 매미 허물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매미 허물 로또를 맞았다'고 해도 될 만큼, 커다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

넘어지는 건 두렵지 않지만

넘어졌다.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콰당, 호되게 넘어졌다. 아이가 아니라, 내가 넘어졌다. 나를 부르는 아이와 이야기하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스텝이 꼬였다. 내 손을 잡고 가던 아이까지 같이 넘어졌다. "괜찮아?" "응" 아이부터 걱정하지만 아이보다 회복력이 떨어지는 내 몸이 욱신욱신하다. 몇 년 전에는 생일 맞은 아이를 축하해 준다고 업어주었는데, 앉아 있던 아이의 발에 걸려 둘이 함께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종종 다친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철봉을 하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나무를 타다가 긁히기도 한다. 그러나 작은 상처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작게 다쳐본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넘어짐과 일어남의 반복으로 아이는 조금씩 신체조절력을 키우며 성..

나는 나무 안에서 산다

나는 나무집에 산다. 나무로 틀을 짜고 얼개를 엮은 목조주택, 나무처럼 높은 꼭대기 다락방에서 산다. 내 방에는 나무로 깎은 십자가에 나무로 깎은 예수님이 계신다. 어느 사제가 성지순례길에 모셔온 성모자상은 올리브나무. 기도하거나 글을 쓸 때는 내가 직접 못 박아 만든 책상에서 하고, 잠을 잘 때는 시원한 대나무를 끌어안고 잔다. 필요한 물건들은 나무로 만든, 남들이 버린 옛 머릿장 안에 들어 있다. 빛은 얼기설기 엮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고, 그 빛은 요즘 보기 드문 성냥으로 들여온다. 식은 차를 덥혀주는 것도, 작은 음악소리를 크게 들려주는 것도 나무의 힘을 빌린다. 내 방에서는 시간도 나무 속에서 흐른다. 일 년 사계절,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도 나무와 함께 지나간다. 소나무가 아플 때 스스로를 치유해..

자잘한 선물이 자잘하지 않은 이유

아이들은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나들이를 가서 예쁜 꽃들을 보면 꺾어 "엄마에게 줄 거야." 하고 챙긴다. 간혹 잊을 때도 있지만, 엄마에게 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바구니 안에서 시들어버린 꽃을 찾아내 엄마에게 건넨다. 시든 꽃일지언정, 그 꽃을 받는 엄마들에게는 어느 꽃다발보다도 값지고 아름다운 선물이었으리라. 나들이 때만 그러는 게 아니다. 놀이 시간에도 엄마에게 준다면서 뭔가를 그리고, 만드는 아이들이 많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종이접기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랑하는 엄마, 아빠나 친구에게 주겠다고 열중해 있는 모습을 보면, 선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함께 생활하는 교사도 그런 아기자기한 선물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아이들이 일곱살 정도 되면, 이런 선물을 남발하고 악용하는..

순간이동을 하고 오라고?

낮잠 시간, 잠을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줄거리를 자주 놓치게 된다. 중간에 아이들이 자꾸 이야기를 끊고 끼어들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사또가 뭐야?" "그 아이 착해, 나빠?" "아빠는 없어?" "여자야 남자야?"처럼 이야기와 관련해서 물어볼 때도 있지만, 전혀 생뚱맞은 말로 이야기의 허리를 자를 때도 많다. 이야기 줄거리를 잊어버릴까봐 한참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종이배! 나 여기 가려워. 모기 물린 데 약 발라줘." "종이배, 나 이번 주말에 캠핑 간다!" "종이배! 그런데, 얘 베개가 나한테 넘어왔어."라고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하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렵다. 가끔은 어디까지 말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번번이 삼천포로..

민달팽이가 남긴 편지

"우리집에 동생 생겼어. 이름은 **이야. 아빠가 사줬어." "나도 어제 **이 사왔어. 내가 울어서 사줬어." 아이들 집에 키우고 있는 앵무새 이야기다. 나도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지만 아이들의 집에도 반려견, 반려묘, 반려조(鳥)에, 반려어(魚)와 반려충(蟲)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산다. 우리집도 아이들이 한참 자랄 때, 정말 많은 생명체가 다녀갔다. 장수풍뎅이, 고슴도치, 토끼, 햄스터, 강아지, 그리고 지금 함께 사는 고양이들. 장수풍뎅이는 큰 아이와 함께 방과후를 했던 효진이네가 너무 많다고 해서 받아온 것이고, 고슴도치는 캠핑장에서 버려진 녀석을 데리고 왔고, 햄스터는 누가 어린이집 앞에 갖다 놓은 것을 맡아왔다. 강아지는 유기견이었고, 고양이는 길냥이 출신이다. 토끼는 내 돈 주고 '사온'..

새소리를 들으면 복을 받으리

새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뜬 것은 잠이 완전히 깼다는 뜻이다. 하지로 향해가면서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은 점점 더 당겨지고, 요즘 같은 시기에는 다섯 시만 되면 더는 자리에서 뭉그적거릴 수 없이 밝다. 오늘은 그것보다 30분쯤 더 빨리 눈을 떴다. 내 눈을 뜨게 하는 새소리를 좀더 잘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가장 먼저 '호꾹 호꾹'하는 뻐꾸기 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더니, 가까이에서 박새들의 소리가 재잘재잘하다. 며칠 전까지 거의 독점적으로 들리던 '휘휘오' 하는 그 소리의 정체는 '꾀꼴꾀꼴'이라는 글자로 번역되는 꾀꼬리였다. 아마 뒷산에서 내 눈으로 노랗고 제법 커다란 꾀꼬리를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점점 사라져간다는 꾀꼬리가 설마 우리집 뒷산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터다. 그 뒤로는 꿩이 꺽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