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졌다.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콰당, 호되게 넘어졌다. 아이가 아니라, 내가 넘어졌다. 나를 부르는 아이와 이야기하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스텝이 꼬였다. 내 손을 잡고 가던 아이까지 같이 넘어졌다. "괜찮아?" "응" 아이부터 걱정하지만 아이보다 회복력이 떨어지는 내 몸이 욱신욱신하다. 몇 년 전에는 생일 맞은 아이를 축하해 준다고 업어주었는데, 앉아 있던 아이의 발에 걸려 둘이 함께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종종 다친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철봉을 하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나무를 타다가 긁히기도 한다. 그러나 작은 상처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작게 다쳐본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넘어짐과 일어남의 반복으로 아이는 조금씩 신체조절력을 키우며 성장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에 난 상처에는 만병통치약이 있다. "저런, 많이 아팠겠네." 하는 공감의 말과 일회용 밴드. 밴드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이 상처는 밴드보다 바람이 더 잘 낫게 해주는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상처에는 밴드 하나만 붙여주어도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런데 우리 터전에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 "우리 아이, 얼굴만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엄마의 아이는 주로 얼굴을 다친다. "우리 아이, 모기에 물리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엄마의 아이는 모기에 더 잘 물린다.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지 못해 난 상처야 교사 잘못이라고 해도, 아이가 넘어져 다치는 거나, 모기가 자기 취향에 따라 와서 무는 것까지도 부모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엄마가 상처에 민감할수록 아이는 더 크게 다치는 이 요상한 법칙을 뭐라 정의해야 할까.
이면지에 박힌 스테플러 심을 빼주다가 손을 찔리고, 글루건으로 놀이감을 붙여주다가 화상을 입고, 철봉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도와주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또 오늘처럼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려다가 넘어지고... 가장 안전하다는 어린이집에서 교사들도 아이들처럼 이런저런 안전사고를 피해가기 어렵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우리나라 보육교사들은 다칠 수도 없고, 아플 수도 없는 사람들 같다. 열두 시간을 근무해도 강철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심심치 않게 소수의 잘못을 일반화하여 싸잡아 비난당해도 싼 잠재적 범죄인 집단으로 욕을 먹기도 한다. 아이들을 만나다가 난 상처는 참을 수 있다. 넘어져서 몸에 든 멍은 낫는다. 그러나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참 오래도록 아프다.(202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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