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이다. 배롱나무 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목수국의 하얀꽃도 갓 지은 밥처럼 소복해지고 있다. 매미가 우는 소리도 커졌다. 아이들은 "숲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파아란 저 하늘이 더 파래지고,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손뼉치기를 한다. 나들이를 나가면 매미들이 벗어놓은 허물을 찾느라 눈길이 바쁘다.
어느 핸가, 매미 허물을 찾고 싶어하는데 그만큼 갯수가 되지 않아서 가져가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통신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고, 여름과 겨울에 한차례씩 오프라인 연수를 가야 했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중에 매미 허물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매미 허물 로또를 맞았다'고 해도 될 만큼, 커다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긴, 그곳은 수십 년 동안 신학생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 생태적으로는 DMZ만큼이나 잘 보존되었으리라. 아이들 생각이 나서 손수건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매미 허물을 보이는 대로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내 이런 행동이 이상했는지, 지나가던 중년 부인네들이 내게 묻는다. "그거 왜 모아요? 무슨 약으로 쓰는 거예요? 몸 어디에 좋대요?" 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서둘러 "아니에요. 아이들 보여주고 싶어서 가져가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지만, 그후로 지하철에서, 기차에서 부서지지 않게 신줏단지 모시듯 대전까지 공수해온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올해는 대박! 아이들과 나들이 중에 매미가 허물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직 날개가 다 마르지 않아 날아가지도 못해 손에 잠시 잡혀주었던 매미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푸르륵 날아갔다. 아이들도 "잘 살아라~!" 하면서 기꺼이 보내주고.
아이들과 나들이를 하면서 참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배롱나무 줄기는 원숭이가 미끄러질 만큼 민둥민둥하고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는 것도, 봉숭아 물을 들일 때는 백반 대신 신맛이 나는 괭이밥을 뜯어 찧으면 더 곱게 물이 든다는 것도. 내가 공동육아 교사로 첫 발을 들였을 때처럼, 교사들이나 부모들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그동안 이름이 그렇게 불려왔다는 것에는 그 생명만의 독특한 히스토리가 있을 것이기에, 정확한 이름을 알고 있으면 그 생명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종이배! '아이셔' 찾았어?" '아이셔'는 신 맛이 나는 괭이밥의 다른 이름이다. "도깨비 방망이가 커졌네?" '도깨비 방망이'는 칠엽수나무의 열매를 말한다. "피리풀에 꽃 피었어! 계란꽃도 많아!" 피리풀은 아이들이 잎으로 피리를 잘 부는 원추리를 말하는 것이고. 계란꽃은 꽃 모양이 달걀 프라이 같은 개망초를 말한다. 이렇게 모양으로 이름을 다시 지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능 또는 역할로 붙은 이름도 있다. 예를 들어,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꼭 모여야 하는 장소에 심겨져 있는 대추나무는 '약속나무'로 불리고, 꽃향기가 좋은 자귀나무는 '향수나무'라고 하는 것처럼.
어릴 적부터 도회지에서 자란 나는 아직도 '벌과 응애'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매실과 자두와 살구' 나무를 헷갈려 한다. '쑥과 익모초'를 구별하는 데, '보리와 밀'의 차이를 알아내는 데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주 작은 변화도 잘 눈치채고, 작은 차이점도 잘 구별해 낸다. 그 아이들이 요즘에는 나무에 낀 이끼를 긁어모아 녹차라떼를 만들고, 여름을 이겨낼 익모초즙을 만들며 논다. 아이들이 숟가락으로 이끼를 긁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무들이 간지러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2020.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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