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0일 재의 수요일
조금 전에 미사에 다녀왔다.
미사를 하면서 체력이 강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동안 왜 그리 '산티아고'를 가고 싶어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산티아고' 순례를 한 사람들이 쓴 책을 열심히 사서 읽고 있으며,
언젠가 꼭 한 번 가고 싶다는 꿈을 말해오곤 했다.
최근 들어서는 그 마음이 풍선처럼 점점 더 커져오는 것을 느끼고,
마치 한두 해 안에 가지 않으면 영영 가지 못할 것처럼 조바심이 나며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했는데....
오늘 미사를 하면서 내가 왜 산티아고를 가고 싶어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산티아고'를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광야'로 가고 싶었던 거였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나의 한계를 만나는 곳으로 혼자 가서
머리로 이미 알고 있는 삶의 의미를 몸으로 새롭게 느끼고 싶었던 거였다.
1년여 전, '단식피정'으로 reset했던 몸과 마음이 일 년여 만에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자
그보다 더 큰 자극을 원하며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고 싶었던 거였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목숨 걸고 걷는 것은 하지 못하며,
스페인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굳이 그것 때문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홀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며,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현깃증이 나서 집에 가고 싶어하는 내가 가족을 떠나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런 내가 그토록 '산티아고'를 입에 달고 다녔던 건,
꼭 산티아고를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변화'되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오늘 미사를 하면서
삶의 '변화'는 산티아고에 가야 생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 단 한 번의 영성체만으로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조바심내며 가고 싶었던 곳,
이번 사순절을 '나만의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진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도 40여일이면 갈 수 있을 것,
몸도 마음도 힘들게 혼자 광야를 걷는 마음으로 40일을 지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일상을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40일의 끝에 가면
나도 어쩌면 나만의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날지도 모른다.
내 몸이 '진짜 산티아고'를 가지 않아도 '나만의 산티아고'를 걸어낸 기쁨을 그날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분은 거기에 먼저 가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곳이 산티아고이고, 갈릴래아이고, 바로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인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몸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한다면,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영성체'일 것이고,
사제의 강복을 받고 길을 떠나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길 가는 도중에도 아마 가장 강렬하게 영성체를 원할 것이고,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면 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도 영성체일 것이다.
오로지 벅찬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범벅이 되어 미사에 참례하겠지...
그런 마음을 기대하며 이번 사순절을 살아보기로 한다.
'내 몸이 산티아고를 걷고 있다면' 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상생활에서도 몸과 마음이 굉장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들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고,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산티아고를 걸었던 사람들이
걷는 과정 중에 자기 안에서, 동반하는 사람들 안에서 일상을 새롭게 느꼈듯이
이 사순절을 지내는 하루하루 동안 하느님이 내게 같은 감동을 선물로 마련해 주실지도 모른다....
* 이 글을 쓰고 난 다음,
나는 내가 산티아고를 직접 갈 수 없는 여러 가지 여건들(체력적, 시간적, 경제적 기타 모든 이유를 총망라하여) 때문에
스스로를 위안하고 합리화하려고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산티아고를 걸었던 사람에게 주셨던 감동을
꼭 산티아고에서만 받을 수 있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하느님은, 체력적, 시간적, 경제적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일종의 '상위 1%'만을 위해 우대하여 '따로 특별한 뭔가'를 준비하시는 분은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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