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31일 일요일
내일모레면 주님 봉헌 축일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꽂혀서
유난히 자주 묵상하기를 좋아하는 말들이 있는데,
'봉헌'이나 '관계'라는 말들도 그것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 두 가지 낱말 모두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만약에 이것을 우리말로 바꾼다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한자어로는 '봉헌'과 '관계'라는 전혀 다른 글자를 쓰지만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 하나에 그 뜻이 다 담기지 않을까 싶다.
특히 '관계'라는 말은,
'아이들이 서로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살도록 이끌어준다,
서로 배타적 관계가 되지 않도록 관계를 잘 풀 수 있게 도와준다,
사람과 자연과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등등 '관계교육'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입에 올리기도 하고,
글을 쓸 때도 아주 자주 쓰게 되는 단어다.
그런데 사실 관계라는 단어는 그렇게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단어 같다는 생각도 든다.
'관계'라는 것은 무척 실존적 존재여서,
그것이 없을 때는 쓸 수 없는 것, 그것이 실제로 있을 때에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배타적 관계'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
사람 사이의 관계도, 하느님과 나의 관계도,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관계'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 뜻에서 '특별한 관계'나 '다른 관계'라는 것도 어쩌면 관계의 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봉헌' 역시 마찬가지다.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봉헌할 수밖에 없는 존재 같다.
이미 그분이 인간을 그분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드셨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순간부터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받았고,
그 부르심을 인간의 입장에서 말할 때 봉헌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는지.
그러므로,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역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은 고백일 수 있겠고,
'제 봉헌을 받아주소서'라는 말은 '저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탄원과 같게 들린다.
그렇게 내 맘대로 생각해 나가다 보니,
사제나 수도자들이 서원하는 청빈, 정결, 순명 서원도 새롭게 다가온다.
아주 소극적으로 그 세 가지 서원은 개인 재산을 주장하지 않는 청빈,
자손 번식을 포기하고 독신생활을 하겠다는 정결,
장상이 결정하는 대로 소임을 받아들이겠다는 순명일 수 있겠으나,
더 내면적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느끼고 채울 수 있는, 좀더 쉬운 생활양식을 택하겠다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 미사 중에 들은 제2독서의 말씀은
이런 내 맘대로의 묵상에 나름 확신을 준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2-13)
서로가 온전히 알게 되는 때,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비로소 관계를 맺는 순간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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