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살이

성령강림대축일엔 뽑는 재미가 있다

종이-배 2016. 5. 15. 09:00

2016년 5월 15일 일요일

 

성령강림대축일이다.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약속된 시간에 묵주기도를 얼른 하고 서둘러 성당에 갔더니

고해소 불이 켜져 있고 그 앞에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령강림대축일 미사에 앞서 고해성사를 봐야겠다 싶어 고해소에 들어갔다.

"이미 떠나간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는 말씀과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말씀에 힘입어

과거의 죄를 곱씹으려 하지는 않으나,

내 살아온 삶을 성찰할 때면 고해소에서 늘어 놓는 내 죄는 항상 반복되는 것 같아

진정한 회개와 성찰이 이루어진 건지, 아니면 습관적인 고해에 불과한 건지 애매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것들까지도 몽땅 통틀어서 하느님 자비 안에 넘겨 드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에 임했다.

졸음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복사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다가

신부님의 강론은 제대로 새겨듣지 못하고,

단지 마지막에 "주님은 그냥 지켜보시지만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만도 아니는 분이십니다."라고 하신 말씀만

마음에 남았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언제나 가장 힘든 부분, 식별이 필요한 부분인

'이끌어 줄 때와 내버려 둬야 할 때'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적절한 때'를 아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니,

그 때를 알게 해주십사 청할 뿐이다.

봉헌을 하면서 수녀님들이 정성껏 만들어 놓으신 성령의 은사 카드를 뽑았다.

성당에 다니고 미사를 하면서 성령강림대축일을 기다리는 재미(?)는 바로 이 은사 카드가 아닐는지.

예전에 수녀원에서는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이면 '진복팔단'을 쓴 카드를 뽑기도 했는데

일반 성당에서는 그런 풍속은 하지 않으니

이렇게 말씀을 뽑는 재미는 단지 오늘 하루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긴, 예전에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주일 미사를 드릴 때는 현관 앞에 '말씀 사탕'이 있어서

미사를 갈 때마다 하나씩 뽑기도 했지만...

아무튼 성령강림대축일에는 이렇게 '뽑는 재미'가 있다.

미사 후에 제대 사진을 찍고나서 나오다가

슬그머니 냉담 대열로 들어간 아이들에게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카드를 두 장 더 챙기고 있는데

젊은 수녀님이 와서는 굳은 표정으로 "한 장씩만 가져가라"고 구박(?)을 한다.

"아이들이 냉담하고 있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른 새벽부터 '성령의 은사' 때문에 젊은 수녀님한테 한 소리 듣고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신자가 많으니 천 장 넘게 일일이 오리고 자르고 하면서 만드느라 힘들었던 수녀님의 노고는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내기에 앞서서 '무슨 사연이 있으니 더 가져가겠지'라고 생각해 주었더라면

아니,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기왕에 만드는 거면 더 넉넉하게 만들어서 두었으면 얼마나 더 고마웠을까...

물론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중에 저녁미사에 온 신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될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지만,

수녀님의 태도만 봐서는 값없이 나눠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인색함이 느껴져서 성당 문을 나오는 발걸음이 불편했고,

아이들에게 주려던 카드도 왠지 '장물' 같은 느낌이 들어 버렸다.

'그래, 오지 않은 아이들까지 챙긴 내가 욕심을 부린 거지, 금방 고해성사 보고나서 괜한 미움 갖지 말자' 하고

불편했던 마음을 다스리려 해본다.

아마 그 수녀님은 자기의 한마디가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아침 식탁에서 "신자들이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그걸 두 장 세 장씩 챙겨가더라고요.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데." 하면서

자기들끼리 신자들의 흉을 볼지도 모른다.

사제나 수도자가 완성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신자들에게 주는 영향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가끔은 기억해야 할 텐데...

 

내가 가장 내적인 평화를 느꼈던 시기가 언제였던가 돌이켜보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때는 첫 서원을 앞둔 2반 노비스의 어느 한 달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틈틈이 만들어 놓은 '말씀 사탕'을 머리맡 서랍장에 넣어 놓고

아침 기상 종이 울리면 가장 먼저 그 말씀을 하나 뽑아 성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 말씀 사탕은 성서 말씀이기도 했고, 당시 일하면서 외우려고 했던 수도회칙 <생명의 책>에서 뽑은 내용이기도 했다.

하루종일 그 말씀을 기억하려 애썼고, 일한 뒤에 자리에 누우면 꿈 없는 단잠에 들었었다.

오늘은 그래, 그런 행복감을 우리 아이들, 우리 가족들에게도 날마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식구들에게 세 끼 밥을 챙겨주는 것이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처럼,

이제는 영적인 양식도 '뽑는 재미'와 함께 챙겨주어야겠다.

이사를 가면 해야지, 했던 마음을 바꿔서 내일부터 당장 해줘야겠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 또다시 뜨거운 사랑으로 임하셔서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주시는,

아주 특별하고도 은혜로운 대축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