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8일 일요일
주일에 새벽미사를 갈 때마다 언제나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약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오늘은 더 자도 돼.'라고 자기 자신을 허용하면서
잠자리에서 빈둥거리는 자유는
어쩌면 출근시간에 꽉 매인 직장인으로서는 당연한 권리이며 기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권리나 기쁨보다도
새벽미사에 가서 누리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 크게 힘들지는 않다.
새벽잠이 없어진 나이탓도 있겠지만...
게다가 새벽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귀와 마음에 쏙쏙 박힌다거나,
뜨거운 성체성사의 감동을 느낄 때는
돌아오는 발걸음이 하늘을 날듯 가볍고
콧노래가 절로 나와서
그 날 하루는 '안식일'을 제대로 즐기고 쉬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
그런데, 오늘 하루는 완전 망쳤다.
C신문 판촉 때문이다.
워낙 본당에 도움을 요청하는 단체들이 많이 오기도 하고,
또 새벽부터 그렇게 다른 본당에 다니면서
판촉을 한다든가, 성전 신축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하는 일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안다.
나도 '문서선교'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그러나, '강론'이라는 시간은 좀 다르다.
어제는 신문사 주간(?)신부님이 오셔서
미사 주례도 하시고 강론도 하셨다.
내 귀가 어두운 건지, 신부님의 말투가 워낙 그러신 건지
또박또박하게 들리지 않아서 더욱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했는데,
강론 시간 서두부터 오로지 신문 판촉만 하셨다.
신부님 말씀마따나, 신문을 팔러 왔으니 그렇게 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가톨릭 신자 집에는 꼭 C신문이 있어야 한다거나
강론 시간에 볼펜을 손에 쥐게 하고
신문을 구독할 사람은 박수를 치라고 하는 것 등에는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미 마음속에 그렇게 분노와 거부감이 들고 보니,
강론 말미에 찔끔, 그야말로 영양가 없이 하시는 복음 묵상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나처럼 많은 신자들이 새벽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추운 길을 걸어 미사에 왔을 터.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고, 그저 사는 일에 지쳐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자 와 앉아 있을 터.
그 위로의 말씀은 전례중에 '우리말'로 해설해 주는
사제의 강론이 어쩌면 가장 큰 역할을 할 터.
그래서 프란치스코 빠빠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강론과 관련된 말씀을
많이 써 놓으셨던 게 아닐까.
강론 시간에 이미 마음이 무척 상하고 삐쳐버린 나는
"구독하겠다는 분들은 박수를 쳐라"라고 하실 때 박수를 치지 않고 주보를 읽은 것과
마치 선심쓰듯 나눠주는 신문 한 부를 거절하는 것으로
매우 소극적인 반항을 드러내고 왔지만, 마음은 몹시 씁쓸했다.
대신에, 집에 와서는,
교회 안의 소식, 울타리 안의 소식, 교계제도 안의 소식만을 전하는 C신문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쓴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양들의 세상에서 복음을 더 잘 전하고 있다고 느끼는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를 더 꼼꼼히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마침 주보에 실린 어느 주교님의 글을 반박하는 글도 올라 있었는데,
아마 그런 글들은 C신문에서는 결코 찾아보지 못할 글일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펼쳐 읽은 <복음의 기쁨>, 145항에
"준비가 되지 않은 강론자는 '영성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자신이 받은 은사에 무책임한 자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빠빠의 일침에 속이 다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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