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살이

그래요, 좋아요, 피앗, 오케이 콜.

종이-배 2013. 12. 9. 06:29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아이의 모든 행동에는 긍정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비록 잘못된 행동이라도 그 안에는 긍정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같이 놀자고 엄마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장난감이 갖고 싶어 친구를 밀칩니다.

엄마와 놀고 싶은 마음, 장난감을 갖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나쁠 것이 없는 긍정적인 동기입니다.

물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먼저 긍정적인 동기를 읽어 주세요.

 

"그 장난감이 갖고 싶었구나. 그래도 밀지 말고 말로 해야 해."

 

긍정적인 동기가 우선인지,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우선인지

부모가 무엇을 앞에 두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야단맞지 않으려고, 나쁜 상황을 피하려고 애를 쓰지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 왔기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뭔가를 하고 싶어 살기보다는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잊지 마세요. 뒤로 걸을 때보다 앞으로 걸을 때가 빠릅니다.

긍정적인 동기부터 읽어줄 때

앞을 향해 걷는 아이로 자라납니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29쪽>

 

위의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는지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동안에는, 그 말씀이 그저 아이들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마음,

솔직함,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존재하는 삶,

그렇게 사는 것이 '아이처럼' 사는 것을 뜻한다고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이다움'이란 '긍정적인 동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에 적용하기 위한 표현으로 '긍정적인 동기'라는 말은

우리가 종종 써왔던 대로라면 '하느님의 섭리, 좋은 뜻'과 같은 맥락일 거고,

빅터 프랭클 식으로 말하자면 '의미'일 것이다.

하느님은 완벽하신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행하는 잘못된 행동을 탓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 안의 긍정적인 동기를 먼저 읽어 주셨다.

나아가 그 행동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잘못된 행동 자체를 지적하시기보다는 나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느님 앞에서

긍정적인 동기를 우선하기보다 두려움을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살았던 적이 많았다.

아마도,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누군가의 표현대로 '반응하는 삶'이라면

긍정적인 동기를 우선하는 것은 '선택하는 삶'이겠다.

위의 책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뭔가를 하고 싶어 사는 것이 선택하는 삶이라면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반응하는 삶일 거다.

오늘 묵상하는 성모님의 수태고지도 그렇다.

성모님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 미치는 결과나 영향을 생각하기보다

그 일 안에 숨어 있는 '긍정적인 동기'를 찾아보시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료하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으신 하느님께서 행하신 좋은 일일 거라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닐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오케이, 콜'이라고 바꿀 수 있을,

성모님의 'Fiat'은 긍정적인 동기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그 받아들임 뒤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긍정적 동기가 드러나리라는 믿음...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뒤,

성모님은 구세주의 육화를 자신의 몸 안으로 이뤄낸, '선택하는 삶'을 사셨던 거다.

두려움을 피하며 반응하는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개입으로 마지못해 선택하는 삶으로 끌려간 요나와 비교해 보자면,

잠시의 고민 후에 곧바로,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택한 성모님은

그 대담성과 결단력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사건을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겠다고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출, 공생활, 죽음과 부활 등 '성모칠고'라고 이름지어진, 그야말로 고통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긍정적인 동기를 찾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라는 성모송보다

"정말 대범하고 대단해요, 우리 어머니.

당신의 그 기운을 제게도 물려주세요."라는 나만의 성모송으로 그분을 찬송하고 싶어지는 오늘...

나도 오늘은, 성모님처럼 그분께서 주시는 시간들, 사건들에 이렇게 응답하려 애쓸 테다. 

"그래요, 좋아요, 피앗, 오케이,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