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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종이-배 2005. 10. 20. 16:37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며칠 후면 시어머니께서 다시 우리 집으로 이사를 오신다. 작년까지 함께 사셨던 시어머니께서 외손자들을 돌봐 주시느라 딸네 집에 ‘파견 근무’를 가셨는데, 칠순의 시어머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덜컥 병이 걸려 버리셨다. 병든 어머니를 돌려보내는 시누이는, 어머니에게는 미안할 대로 미안하고, 아직 손길이 필요한 아이는 아이대로 걱정이 되어서 무척 난감해 하고 있다.

시누이를 생각하니 지금은 여섯 살이 된 아이를 낳았을 무렵의 일이 떠오른다. 난 그때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또 맞벌이를 해야만 도시에서 그럭저럭 살 만큼 벌기 때문에 아이를 맡아 키워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친정어머니는 워낙 건강이 안 좋으셨기 때문에 그야말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처지임을 시어머니께서 알고 계셔서, 시어머니는 기꺼이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시어머니 역시 할머니는 할머니라, 아이 돌보는 고단함을 견디기 힘들어 하셨다. 회사에 다녀와서 저녁을 차리는 동안, 시어머니는 어느 틈에 꾸벅꾸벅 졸고 계셨는데, 그때의 미안함이란.

나는 그런 시어머니를 보며 ‘스페어’ 이자 ‘히든카드’였던 외숙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겼고, 목요일 아침이면 분유병과 기저귀를 바리바리 싸서 외숙모에게 아이를 데려다주고 토요일 퇴근하면서 데려왔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두어 달 못가서 그만두게 된다. 애착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시기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이를 내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시어머니와 외숙모,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세 사람의 보육방식이 너무도 달랐기에, 아이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취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내가 낳은 새끼, 내가 키우는 것. 회사를 그만두고 2년만 직접 키우기로 했다. 설마 2년 동안 내가 안 번다고 굶어죽으랴 생각하면서.

그렇게 전업주부로 아이를 돌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가면서, 내가 회사 일에 염증을 느꼈던 것도 아니고, 회사가 나를 싫어라 했던 것도 아닌데, 오로지 아이 키우는 일 때문에 사직을 해야 했다는 것이 왠지 좀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 나라가 뭔가 해줄 것도 같았다. 고용보험관리공단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때 담당자는, 아무리 육아 때문이라고 해도 내가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할 거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실로 그 내용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람이 했던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보험금을 받으려면, 사둔의 팔촌까지 친척 중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하고, 집에서부터 회사까지 오는 동안 보육시설이 한 개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불행하게도(?) 탈북자도 고아도 아니어서 건강이 좋지 않은 친정어머니, 시어머니에 친정언니에 시누이까지 아이 봐줄 사람이 줄줄이 있었다. 비록 다들 자기 아이들을 보육시설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직장여성들이었지만. 그리고 회사까지 보육시설은 한 건물에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았다. 발을 밖으로 내딛기 전인, 우리 아파트 1층에 와글와글 아이들이 모이는 놀이방이 있었으니까. 고용보험관리공단을 나서며, 나는 아이를 낳아봤자 내가 나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자기 아이는 죽든 살든 부모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뼈아픈 현실을 절감한다.

그후 일 년 반. 시어머니의 전통적 육아법, 이웃집 엄마들과 친구로부터 들은 수만 가지의 정보들, 틈만 나면 찾아보느라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육아서 등.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는 채 주워들은 지식만으로도 나는 반쯤은 소아과 의사가, 반쯤은 보육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희망을 놓지 않아서였던가, 예상치 않았던 취업 제의가 들어왔다. 아이를 또 맡겨야 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고민하지 않고 보육시설을 찾았다. 내 남편을 낳았다는 죄 아닌 죄로, 늘그막에 아이 보느라 부쩍 늙어 버리신 시어머니께 또다시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기에. 그리고 주변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단지 ‘자기 아이를 키워봤을 뿐’이지, ‘보육 전문가’는 없었기에.

그러던 중에 우연찮게 어느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알게 되었고, 20개월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곳에 아이를 보내고 있다. 내 아이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노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그곳의 운영 경비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공유할 수 있어서 일단은 마음이 놓인다. ‘부모 참여’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기본적인 축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내게 어린이집은 늘 ‘영순위’이다.

이 땅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확실히 아이보다 더 많이 내가 컸다. 보육정책에 대해서 무지에 가깝던 내가 ‘사이비 보육 전문가’의 수준 정도는 되었고, 비록 동네 어린이집이라는 작은 단위이기는 하지만 내 아이를 비롯한 이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서 힘을 모으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와 있으니 말이다. 비록 이 나라는 내가 아이를 낳고 어떻게 키울까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어떤 직접적인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이제 내후년이면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이제는 슬슬 교육정책에 대해 관심이 가는 걸 보면, ‘사이비 보육 전문가’에서 ‘사이비 교육 전문가’가 되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부모가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그 녹록치 않은 과거가 반복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고문. 200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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