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텔레비전을 끄기로 생각한 그 날은 금요일, 마침 아이 아빠가 경북 청송으로 하루 출장을 가게 되어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아이와 날마다 자기가 미리 정해 놓은 프로그램을 딱 하나씩만 보기로 약속하고 있는데, 금요일은 그 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인 ‘로봇파워’를 하는 날이다. 금요일에는 밖에서 하는 식사도,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 집 마실도 마다할 정도로 아이에게 ‘파워’가 있는 ‘로봇파워’, 과연 아이가 그것을 포기해 줄지 궁금했다.
“규진아, 그 날 아빠가 혼자 출장 가신다는데, 우리도 그 차 타고 따라갈까?” “좋아.” “그런데 거기에 가면 로봇파워는 못 볼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음, 할 수 없지 뭐.” 뜻밖에도 아이는 선선히 아빠의 출장 길에 따라나섰다.
자동차로 너댓 시간 걸려서 도착한 청송. 아빠가 일을 보는 두세 시간 동안, 아이와 나는 주왕산 아래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산에 갈 준비도 하지 않았고 시간도 많지 않아서 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산 아래 들판에서 모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 달리기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러다가 쉴 때면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 보겠다고 나뭇가지를 던져 보기도 하면서. 그러고는 또다시 너댓 시간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뛰어도 뛰어도 지치지 않는 아이와 밖에서 두세 시간을 뛰어논다는 것은 사십 대 중반의 내 체력으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또 좁은 자동차 안에서 너댓 시간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무척 피곤했다. ‘아이구, 단 하루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서 이렇게 무리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몰려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핑계삼아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으니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위로했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피로가 다 가시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몸이 무겁다. ‘다음에는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야지, 이건 안 되겠군.’ 내 몸도 편하면서 텔레비전도 차츰 멀리하게 할 묘안을 궁리하는데, 나보다 한수 위인 아이가 눈을 뜨면서 내게 묻는다. “엄마, 어제 못 본 로봇파워 재방송은 언제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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