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천천히 읽기]
박병규 / 성서와 함께
성탄시기에 읽을 만한 영적독서를 고르다가
최근에 나온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복음 천천히 읽기]를 골랐다.
책 제목 그대로 요한복음을 천천히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박병규 신부님이 쓰시는 글 자체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서 고른 책이다.
역시나 마음에 팍팍 꽂히는 글들이 많다.
구구절절 주옥 같아 읽는 쪽마다 밑줄과 별표가 가득하다.
아끼며 조금조금 읽고, 밑줄을 긋는데 한꺼번에 옮겨 적기 힘들 것 같아
날마다 읽은 부분을 업뎃하기로.
단지, 조금씩 더 읽어가면서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저자의 문장이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고, 따뜻한 듯하지만 매우 차다는 것이다.
성서뿐 아니라, 모든 책에서는 저자의 영적인 기운이 감돈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떤 책에서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한편,
어떤 책에서는 열심히 그러모았으나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성서도, 네 개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기운을 준다.
요한복음서 자체에서 내가 받은 기운은 신비로운 보라색과 주황색이 감도는 듯한, 그런 것인데
요한복음을 해설하는 이 책에서는 물처럼 파랗고 이성적인 회색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무슨 '최순실식 화법' 같은 생각도 들지만서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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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처음에(1,1-5)
- 읽히기 위해서 되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던 성경 저자들의 섬세함과 진지함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은 '읽기 쉬운' 책이 분명하다. 성경 속에 스며든 천상의 진리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 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11
- 성경은 참 쉬운 책이다.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보여준 만큼 꾸짖고, 꾸짖은 만큼 보듬는, 너무나 쉬운 책이다. 어쩌면 우리의 지식(에 대한 오만)이 이토록 쉬운 책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고, 창조의 힘을 갖고 있다. 현대 성경 주석학의 발전은 놀라우나, 그 발전의 그늘에는 말씀을 학문의 대상으로 격하하는 유혹과 위험이 상존한다. 11-12
- 살아 있는 말씀은 지식 쌓기의 멍에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 주석학은 말씀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건, 생명을 위해서다. 12
- 성경이 2천 년 전 살아간 신앙인들의 실천적 삶의 고백이라면, 그 성경을 읽는 지금 신앙인들 역시 삶의 자리에서 어떤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13
- 말씀의 육화는 지금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실천적이고 적극적으로 제 삶을 사랑하는 데서 주어지지, 책상 위 주석서들에 의존한 채 세상을 가르치려는 도도한 자세로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읽을 요한복음서는 저 천상에 유폐된 모호한 말씀이 아니라 살내음 가득한 인간 세상 속 사랑의 언어로 쓰였다. 13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없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그리하여 오직 하느님만이 계셨던 시간이 '한처음'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을 시간이다. 하느님만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시간, 그 시간의 '없음'은 절대적 공허함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없음은 그 모든 있음을 향한 가능성의 시간이다. 가능성의 시간, 여기에 요한복음 읽기는 집중되어야 한다. 하느님만이 계신 그 시간이 모든 것에로 열려 있는 가능성의 시간과 만난다. '한처음'에 '말씀'은 살아 움직였고, 말씀은 없음의 자리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가시적인 작품들을 채워넣었다. 14-15
-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살을 취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요한복음의 예수님이시다. 15
-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갈라지는 데 익숙해진 이가 많다. 자신의 진정성과 지식을 절대적 진리로 착각한 채, 함께 살아가는 조화와 연대의 가치를 망각한 이들, 그들에게 다시 묻는다. '한처음'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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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빛(1,6-18)
-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곳은 어디든 간에 얼마간의 불편과 낯섦이 동반하기 마련이다. .. 대개 빛에 대한 이해는 어둠과 대립하여 형성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빛이냐 어둠이냐를 묻지 않으며, 어둠을 쫓기 위해 빛을 언급하지 않는다. 태초에 하느님이 빛을 창조하신 건(창세 1,3-4)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19
- 불편과 낯섦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보듬을 수 있는 영적 내공을 쌓기 위해서다. 요한복음의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지, 어둠을 몰아내고 홀로 찬란하지 않다. 19-20
- 빛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빛과 더불어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되새기게 한다. 20
- 하느님에게서 난 존재는 사람의 욕망과 결을 달리하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은 나의 인간적 욕망이 무엇인지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의 욕망을 안다면, 그것에 억눌려 늘 배고파하고 아쉬워하며 욕망의 실현을 위해 또다시 배고파하고 아쉬워하는, 종살이의 무한 반복을 멈출 새로운 길 역시 알게 될 터이다. 그 길의 시작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동시에 '빛의 자녀'가 되어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되낟. 21
- 빛이 오셨다는 사실과 그 빛을 받아들여 어둠을 없애려는 노력은 서로간의 사회적 관계성을 전제한다. ... 빛의 성격은 '다른 존재'에게서 완성되고 추구되며, 빛의 자녀가 되려는 노력은 빛에 대한 갈망과 타잔에 대한 열린 자세에서 가능하다. 21
- 주고받는 이들의 증언 속에서 빛은 제 가치를 발산한다. 증언된 것은 증언한 자와 그 증언을 듣는 자 사이에 일종의 '신뢰'를 전제한다.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팥으로 메주 쑨다는 말을 더 신뢰하는 사람은 콩이 메주가 된다는 사실에 둔감해진다. 요컨대, 진리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열린 자세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22
- 누가 대단한 무엇이 된 사실만 강조하다 보면 대개 비교하는 버릇이 생긴다. 이렇게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못난 구석이 우리에게 적지않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나도 가능할까?' 등의 질문은 결국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든가, '저렇게 되지 못하는 난 이제껏 뭣 때문에 살았나' 하는 욕망의 찌꺼기를 긁어모은다. 그러나 그 대단한 누군가가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스스로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함께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짙게 깔린다. 여기, 곧 너와 내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자리에 신뢰와 사랑이 쌓여간다. 22-23
-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것은 전지전능하고 존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 존재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을 꾸려나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겸허히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도록 불린 존재가 인간이다. 23
- 신앙인은 2천년 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찾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의 몸짓, 말투, 사상 안에 하느님이며 참인간이신 예수님이 여전히 숨 쉬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삶이 어떻든, 때로는 힘들고 슬프더라도, 우리의 지금이 예수님이 살고 싶으신 생명의 자리다. 예수님과 교감하고 공감하는 일은 지금을 부정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데서 가능하지 않다. '더 나은 내일'에 저당잡힌 정서적 감옥에서 벗어나 지금을 사랑하고 지금에 투신하는, 그리하여 평범하지만 대범하게 '오늘도 그만하면 잘 산 거야!'라고 스스로 토닥일 줄 아는 데서 예수님은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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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19-28)
- 신앙의 가치가 세상의 권력에 이용당하는 데 '아니요'라고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다. 세례자 요한은 제도권 종교의 한계에 갇힐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온 이가 아니었다. 28
- 요한은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으로 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30
- 새로운 존재를 찾아 나서려면 지금의 가치와 전통과 사상과 권력을 기반으로 한 일련의 '익숙함'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고 추구하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기존 것을 내려놓는 '비워냄'에 부응해야 한다. ... 세상에서 살되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과 대화하되 세상에 '아니요'를 외치는 일이어야 한다. 31
-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스스로 '아니요'를 외치며 팍팍한 현실에서 참된 메시아를 증언할 용기는 있는 걸까. 아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싶어 하기는 하나.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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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음의 은총(1,35-51)
- 듣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들을 귀는 참으로 귀하다. 소리가 아니라 본디 의미를 깨닫기 위해 서로의 말과 논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게 듣는 것이다. 33
- 들음은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만남은 객관적 두 실체의 공존만이 아니라 주관적 신앙의 고백으로 재탄생한다. 34
- 열림은 서로에 대한 끌림으로 연장되고, 끌림은 함께함으로써 서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간다. 35
-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특별한 재능도 능력도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정신적 배고픔'이 필요하다. 35
- '왜'라는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변화의 자유에 둔감하다. 그리하여 하나의 방식과 강력한 주류의 힘에 어떤 견제나 면역력 없이 '현실 탓'을 하며 그 '현실'만큼만 사는 걸 삶이라 강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고백한 나타나엘은 나자렛을 '의미 없음'으로 여기게 만든 기존 가치 체계의 울타리를 뛰어넘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신앙고백이지만, 그 비현실이 나타나엘에게는 현실이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제자 됨의 기본이다. 36
- 요한복음의 제자 부름은 특이하다.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나타나엘을 통해 제자의 본모습을 그려나가고, 제자 중의 제자로 여겨진 베드로를 수동적 인물로 묘사한다.(1,41-42) 현실과의 줄다리기에서 비현실적인 희망을 현실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은, 특정 인물의 영웅담이나 멘토들의 모범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정직하게 부딪히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신적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창조 행위여야 한다. 37
-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하고, 기존 가치 질서를 극복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일이다. 세상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변화하며 흘러왔고 변화 속에 흘러간다. 변화의 몸부림은 꽤나 아픈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이 또한 크다. 상처를 기꺼이 받아낼 수 있는 내적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현실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 옆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 물음에 대한 수많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서, 예수님은 육화하시고 부르시고 가르치신다.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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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표징과 믿음(2,1-12)
- 요한복음을 읽는 데는 사건 너머를 볼 수 있는 열린 눈이 필요하며, 그 열린 눈이 이른바 '믿음'이라는 것이다. 41
- 카나의 혼인 잔치는 '사흘째' 되는 날 시작되었다. .. 그 육화 사건은 '사흘째'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 곧 예수님이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말하자면, '사흘째'는 하느님의 육화 사건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시간을 드러내는 새로운 시작이다. ... '사흘째'는 예수님이 보여주실 일곱 개의 표징적 사건, 곧 카나의 혼인 잔치를 시작으로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11장)까지 계속되는 시간이며, 종국에는 예수님의 때, 곧 십자가의 때를 향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 시간에 매몰되어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 없는 또 다른 시간을 예고하신다.
요한복음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때는 언제일까? .. 사도 바오로의 표현(1코린 1,23참조)을 빌리자면, 걸림돌이고 어리석음이 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시간을, 요한복음은 '영광의 때'라고 말한다. 42-43
- 요한복음이 그려내는 믿음은 그 과정이 매우 지난하다. 마리아의 말을 시작으로 그 지난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다. ... 요한복음의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관계로 묘사되며, 그 관계조차도 예수님은 '여인'이라는 호칭으로 규정해 버린다. 44
-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간의 '거리'를 암시하는 '여인'은 마리아를 예수님과의 육적인 관계 안에 고착시키지 않고, 요한복음에 쓰인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 나아가 우리 교회 전체와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호칭이다. 44-45
-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주목하기보다,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 움직임은 정결례에 사용된 물독이 가리키는 의미와 정확히 조응한다. 46
-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11,40)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저 구름 위 하늘에, 또는 저세상에 지으려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변화를 통해 드러내려 하셨다. 46-47
- 믿음의 눈을 가지기 위해 남은 일은 몸과 마음의 유연성을 키우는 일이다. '현실 핑계'로 현실이 극복되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는 완고함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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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전 정화 사건(2,13-25)
- 예수님이 '엎어 버리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속적 이해관계였다. 49
- '엎어버리는 행동'이 폭력적일지라도, 그 폭력은 상대를 향한 반감과 대립에 소용되지 않는다. 50
- 예수님이 곧 성전이라는 심층적 의미의 도식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다. 51
- 하느님의 생명으로 초대하신 분은 스스로 세상을 위해 죽어가시는 '어린양' 예수님이시다. 그런 예수님에게 성전은 어떠한 희생제물도, 어떠한 돈도 필요치 않은 곳이다. ... 예수님이 성전을 엎으신 건,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제대로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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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2,23-3,21)
- 니코데모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관점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세상 것에만 휘둘려 하늘의 뜻과 가르침을 멀리하는 삶에서 탈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56
-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져 하늘의 큰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에제 36,25-28 참조) 요컨대 기존의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이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는 일이다. 56-57
- 하늘에서 내려온 이는 분명 하늘을 알고 있다. 이 세상만이 아닌 저 높은 하늘의 신비를 알고 있는 존재가 '사람의 아들'이다. 세상살이의 한게를 하늘을 통해 직시하고, 하늘을 품어 땅을 변화시키려 했다. 거기에 '사람의 아들'만큼 적확한 표현은 없었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되, 누가 뭐라 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두 세계가 사람의 아들을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된다. 58-59
- 사람의 아들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생명을 위해서다. 생명은 인간 삶의 지속적 영위나 풍요로움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만나는 데서 이루어지는 관계 지향적 개념이다. 그래서 생명은 하나의 '만남'이고 온전한 의탁이다. 59
- 선택은 특별한 능력이나 지식을 담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60
- 신앙생활은 인간적 삶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전복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현실에서 눈치껏 사는 처세를, 도사처럼 온유한 미소를 신앙생활의 기본 덕목이라 여기는 데서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60-61
- 무수히 많은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먼저 사랑할 줄 아는 게 신앙생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하기에 빚어지는 다툼과 갈등을 '이해 못할 무엇'으로 여겨 외면할 게 아니라 다툼과 갈등의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존재론적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제 삶의 터전과 그곳에서 익힌 수많은 지식과 경험에 갇히지 않는, 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보고 사유하는 식견을 갖추는 것, 그것은 유다의 스승이며 최고 의결 기구의 권력에 속한 니코데모조차도 이루지 못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려운 일이 우리 신앙인의 몫이다. 우린 참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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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턱없는 경쟁(3,22-36)
- 다만, 서로의 시간 약속에 충실하면 되었다. 서로를 위한 약속보다는 제 처지에 맞갖게 사회가 움직이길 바라고, 그 바람이 제 이익의 기준에서만 가치롭다 여기는 체제, 그것이 신자유주의다. 이런 사회는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이에게는 천국이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지옥이 된다. 사실 경쟁한다지만, 그 경쟁이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데 말이다. 천국과 지옥은 출신의 운에 맡긴 채, 사람들은 지쳐만 간다. 63
-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서로 다르되 공감하는 부분이 있고, 서로 떨어져 있되 함께할 수 있는 구석이 있음은 분명하다. 공감과 구별이 서로 엮여 있는 것이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였다. 64
- 탐욕의 원리는 '타인이 가진 것은, 모든 것을 가져야 하는 나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데 있다. 사회의 경쟁 구도는 대체로 경쟁의 조건에 대해 무감각한 현상을 보인다. 서로의 처지가 어떤지, 어떤 조건으로 삶을 영위하는지 묻지 않은 채, 다만 내가 가져야 할 '모든 것'에 매몰된 게 탐욕의 민낯이다. 65
- 경쟁은 논쟁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대립을 부추기는 데 소용된다. 66
- 요한과 예수님의 증언이 하나라는 점이다. 앞서 예수님을 치켜세우며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했던 요한은, 선포하고 증언하는 데 있어 예수님과 하나 된다. 하나 됨은 획일화와 다르다. 세례자 요한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흙에서 나왔으며(1코린 15,47), 사람의 지식과 경험은 흙으로 대변되는 땅의 것에 한정된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신 분,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3,31). 하늘과 땅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인 땅이 모든 것인 하늘 안에 포함되어 함께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땅을 단죄하고 벌하기 위한 게 아니라, 증언하기 위해서다. 그 증언은 물론 이 땅 위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3,36).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대단한 영웅이 되는 것, 말하자면 예수님과 같은 영웅의 삶을 똑같이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알아듣는 것이지, 모두가 예수님처럼 도인이나 성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이 내 삶에서 누구이시고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묻는 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아가게 된다. 67-68
- 요한은 자신의 자리와 예수님의 자리를 혼동하지 않았다. 요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우리가 경쟁하는 대상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자신의 자리가 명확하고 분명해야 육화하신 예수님이 한결 선명히 드러난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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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4,1-42)
- 전문가여야 할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민중이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럴수록 민중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단절되는 일상을 체험했다. '내 아이만 괜찮으면..., 내 건강만 괜찮으면...' 서로서로를 '위험물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연한 대한민국의 일상이다. 70-71
- 위험물질로 간주되는 갈등의 자리에 예수님은 기꺼이 함께하신다. ... 예수님의 등장은 이런 일상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는 데 소용된다. 71
- 물을 달라는 예수님은 이미 일상 너머에, 예전에 체험하지 못한 '창조적 자리'를 만들어내셨다. 다시 목말라 길으러 와야 할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얻을 수 있는 자리, 그곳은 '하느님의 선물', 그리고 '살아 있는 물'의 자리였다. 72
- 살아 있는 물로서 성령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관계는 '살아 있는 물', 곧 성령을 두고 역전된다. 72-73
- 그분은 참된 예배의 공간을 '영과 진리' 안으로, 그 시간을 '바로 지금'으로 제시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영과 진리'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지금의 때'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을 암시한다. 73
- 참된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지금'이 참된 예배의 때다. 이 산이냐 저 산이야, 아니면 이 민족이냐 저 민족이냐, 또 아니면 신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일찌감치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 순간이면 족하다. 그가 누구든, 예수님을 알든 모르든, 예수님은 그와 늘 함께 계신다. 74
- 예수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구유에 모시는 구세주의 모습은 예수님이 왕관 쓴 왕자님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구유 예절의 주인공을 거지꼴로 꾸며놓은 성당은 없지 않은가. 꾸미고 규정한 하느님, 그래서 인간적 인식과 이해의 깊이와 넓이에 꼭 맞아떨어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별스럽지 않게, 때로는 하찮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할 순 없을까. 75
- 단절을 화합과 신뢰로 잇는 것은 예수님이 만들어놓으신 '창조적 자리'에 마음을 여는 일상의 긍정적 일탈로 가능하다. 75
-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찾기 위해서 나의 우물을, 나의 두레박을 던져버릴 용기를 가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을 아는 건, 현실의 외피를 뚫고 나와 무한한 상상에 설레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때로는 낯설고 힘겹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사회라는 그 새로운 세상에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서로는 '위험 물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숙제를 기워 갚는 빚쟁이들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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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참된 예수, 참된 신앙(4,43-54)
- 왕실 관리는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자신에게도 믿기지 않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테다. 죽을 위험헤 처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만 했다. 78
-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48) 표징과 이적을 믿음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가 표징과 이적을 찾는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징과 이적을 찾아 나서는 그 바람에서부터 믿음의 실마리를 끄집어 낸다. ... 믿음의 시작은 거창한 노력이나 도인의 고결함이 아니라, 신기한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현실의 무게 앞에 주저앉은 이의 간절한 바람으로도 가능하다. 믿음은 본래 그렇다. 79
- '말씀 한 마디', 그것이 왕실 관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왕실 관리가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80
- 신앙은 온전한 의탁, 또는 전적인 간절함이 만들어내는 실천적 움직임을 통해 도드라진다. ... 참된 신앙은 단순함 하나로 족하다. '말씀 한 마디'를 듣고, 그것을 전부로 여기는 태도, 그것이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삶의 언저리를 더욱 넓혀간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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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갇힌 믿음에서 열린 믿음으로(5,1-18)
- 예수님은 뱀의 유혹에서와 같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게 아니라(창세 3,1 이하 참조), '일'을 통해 하느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였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그분의 권위이자 권능이었다. 85
- "가거라." 병든 이는 가야 한다. 그가 그 자신이기 위해서, 그가 그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 대개 완고함은 문제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나 고민을 비껴간다. 완고한 이들은 본래 문제의 핵심을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다른 문제로 가리거나 흩어버린다. 86
- 사람이란 늘 그렇게 완고하다. 사람의 성숙도는 좀 더 값지고 훌륭한 것을 얼마나 체득하느냐가 아니라, 다르고 새로운 것에 얼마만큼 열려 있느냐에 따라 그 값이 매겨지는 법이다. 87
-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나, 그 만남을 깨닫는 것은 더디기 마련이다(루카 17,17-18 참조).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줄곧 일하신다(요한 5,17).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쉼 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어버린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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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부전자전(5,19-30)
- 예수님 말씀의 진실성과 확고함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신앙 고백과도 같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적 욕망으로 허튼소리를 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아멘, 아멘'으로 끈질기게 강조하신다. 91
-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겸손으로 가능한 것이었지만(5,19 참조), 아들의 낮춤에는 아버지의 낮추심 또한 숨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는 몸소 당신이 움직이시지 않고, 아들을 통해서만 세상에서 일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절제를 보여주시고 아들은 아버지만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절제한다. 우리는 이 둘의 절제를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으로 하나 된 내적 친밀성은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없애준다. 서로가 닮아서 하나가 된다(콜로 1,15; 히브 1,3참조) 91-92
- 아들 예수님의 심판은 다르다. 아들이 생명을 갖고 있고 생명이신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면, 심판의 이유와 목적은 단연코 생명이어야 한다. 생명으로 초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심판이다. 93
- 예수님의 입장에서 심판은 당신과 아버지, 그리고 믿는 이들이 함께하는 만남의 잔치다. 만남의 잔치에 합당한 자세는 '듣는 것'이다.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것으로 생명을 얻어야 한다. 복음은 듣는 이들을 통해 이 세상에 울려 퍼진다. 듣는 행위는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서 '듣기 싫어도 듣는' 데로 나아가는 자기 해방의 지난한 여정이기도 하다. 수없이 많은 소리와 말을 매일같이 듣고 있어도 인간은 취사선택하여 듣는 데 익숙하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과 행업을 이 세상에 보여주실 수 있었던 것은 열린 마음으로 듣고, 있는 그대로 듣고, 빠트리지 않고 들으셨기 때문이다. 듣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간다. 93
- 말하고 싶고 듣고 싶어도 더는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간이 분명 찾아온다. 죽음.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단절 너머에서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5,28) 94
- 태초에는 생명만이 있었다. 죽음은 생명의 대립으로 존재했던 게 아니라, 생명을 거부한 이들의 완고함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생명과 죽음은 '힘의 경쟁'에 따른 이분법적 대립을 끊어낸다. 94
- 약함과 강함이 사람의 아들의 형상 안에 하나로 얽혀 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1,18 참조). 예수님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이 조우하고, 모순과 대립 개념이 사라진다. 흑과 백이, 죽음과 생명이, 그리고 인간과 신이, 지금 이 시간 한자리에서 하나로 살아 숨 쉬는 건, 오로지 사람의 아들 예수님 덕분이다. 95
- 생명이란 게 별건가. 서로 닮고 서로 함께하는 것이 설렐 때, 그래서 사는 게 맛나고 기쁨이 될 때, 그때 생명은 인생 도처에 스며든 선물 그 자체인 것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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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랑하면 될 터인데...(5,31-47)
-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힌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핏기 어린 아우성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폭력적이 되곤 한다. ... 역사는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해석 주체들이 내놓는 다양한 의견의 조합 또는 대립을 통해 제 속살을 드러낸다. 그래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건 늘 시끄럽고 야단스럽다. 그게 역사다. 우린 지금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97
-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 정당성을 얻고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 공증된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로서 서로를 증언하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와 율법, 또 예언자들을 통해 줄기차게 선포되었다. 98-99
- 그들에게 하느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건,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는 지적 허영 혹은 습관적 교만 때문이다. 허영과 교만은 대개 삶의 익숙함과 그 익숙함이 빚어내는 지루함에서 시작된다. 100
-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게 아니라,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는 익숙함을 거부하지 못했다. 삶의 익숙함이 새롭게 찾아오시는 하느님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 성경이라는 '책'에 드리운 저들만의 특출난 해석으로 특정 계급을 형성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실제 삶에서 밀쳐냈다. 100
- 하느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은 백성들 삶에 직접 찾아오셨고 함께 머무셨다. ...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믿는 이들의 내적 일치를 표현하는 데 '메노'가 사용된다. 인격의 내적 일치는 적당한 공부와 지식의 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격에 대한 이해와 인격체 간의 친교는 피땀이 뒤섞인 저잣거리의 애환 속에 더욱 뚜렷해진다. 인격은 직접적 삶의 체험, 곧 함께 머무르는 일로 다듬어지고 가꾸어진다. 101
- 사랑하면 될 터인데, 그게 어렵다. 이런저런 지식의 총체 안에 난해한 개념들을 무기 삼아 하느님을 이해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성경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명제 앞에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까. ...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교과서적인 삶은 애당초 존재치 않는다. 다만 어찌 살아가든, 삶 그 자체에 하느님은 늘 함께하신다. 사랑하면 될 터인데, 어찌 사랑할까 고민하다 진짜 사랑을 놓치는 일, 그만하면 안 될까.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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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상상하라!(6,1-15)
-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돈'을 벌기 위해 치열한 경쟁 논리가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나눔과 연대의 정신이 무엇인기 우리에게 묻는다. 103
-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교육 방법은 '시험'을 통해서다. ... 세상의 화려함에 굴복하면서 남과의 비교 우위에 젖어 있는 우리 일상의 풍경은 예수님의 시험 풀이와 결이 다르지 않을까. 104
-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6,5)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라는 부사다. ... 대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듣는 데 사용되는 '포텐'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를 이끈다(19,9 참조).
- 군중이 배불리 먹은 것은 물리적 양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있음에도 감사와 나눔이 풍성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06
- 예수님은 적은 것, 소박한 것, 부족한 것을 풍요롭게 만드셨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셨으며, 그것으로 나눌 줄 아셨다. ... 하찮은 음식으로 많은 이를 배 불렸다는 이 두 이야기에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돋보이고, 그 자유로움 안에 하느님께서 복을 베푸셨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요컨대 빵의 기적 이야기는 인간의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강복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07
- 돈만 벌고, 가진 자를 닮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세뇌 장치를 뜯어고칠 교육이 필요하다. 돈이 없어도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면,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깨쳐야 한다. ... 돈 없이 값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오늘도 일하는 것이다.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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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보고 듣는다는 것(6,16-21)
-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것은 침묵과 절제다. 신 앞에 나약한 존재로 서 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 앞에서 어떤 말과 행위도 의미 없음을 전제하는 일이다. 결국 두려움 앞에 선 인간의 유일한 자세는 침묵과 절제로써 신의 다스림에 오롯이 귀의하는 전적인 의탁이다. 112
-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적 노고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일상의 신앙생활 속에서 늘 되짚어 반성하고 묵상해 보아야 한다. ... 노를 젓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없었다. 항해의 혼란 속에 예수님은 부재했다. 113
- 빛이 어둠 속에 왔으나 어둠은 빛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둠을 포기하는 결단이 수반될 때 빛이 빛일 수 있다. 114
-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대개 사람은 보이는 걸 보고 들리는 걸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보고 두렵게 느끼는 건 내 삶의 자리가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두렵다고 여기는 삶의 자리에 예수님은 늘 계신다. 다만, 우리의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져 계실 뿐이다. 함께 가고자 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거리감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에 필수적이다.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지만, 자칫 오해나 욕심으로 인해 그분의 뜻을 곡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잡는 작업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115
- 보고 듣는 것, 너무나 쉬운 것이되, 매번 어렵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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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금의 여유(6,22-40)
- 어차피 인간은 육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고, 육적인 것을 제거한 뒤 도대체 무엇으로 영적인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은 '살덩이'를 취하신 하느님을 강조하며, 육과 세속을 떠나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을 갈구하라는 이른바 '이원론적 사고'에 무던히도 저항하기 때문이다. 118
-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 육적인 것보다 낫다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매일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뭐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것이 육이든 영이든 간에 말이다. 118
-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표징 너머의 의미를 찾지 않고 표징 자체에 집착하는 우리의 근시안적 태도가 아쉽다. .. 경쟁에 지친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건, 대개 마음을 다스리며 평안한 쉼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피로 사회'가 되면서, 소진된 육체와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자리가 종교라고 믿는 대중에게서 빵을 찾아 나선 군중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119
- 요한복음을 읽어나가는 데는 표징을 표징으로만 보지 않고 그 너머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태도, 빵을 빵으로만 보지 않고 나눔의 풍성함을 체험할 좋은 기회로 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6,1-22 참조).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여유'가 표징 너머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유일한 길이다. 120
- 영원한 생명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은 빵 조각이 버려지지 않도록 모두 모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6,12)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이라고 번역된 말씀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아폴루미'로 '잃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다. ... 우리 중 누군가 '버려지는 것'은 태초부터 하느님이 원하신 게 아니다. 121
- 예수님에게 진정한 삶이란 현실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는 일련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6,35 참조). 이를테면, 게걸스럽게 빵을 먹고 나누는 이 자리가, 또 다른 빵을 갈구해야만 하는 배고픈 자리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리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의 배고픔은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완고함과 '이건 너무 적어!'라고 늘 배고파하는 무한한 탐욕의 결과이지, 빵이 없어서가 아니다. 122
-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신기한 이적이나 낯선 광경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을 통해, 곧 빵이라는 일상의 필요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신다. '일상'은 '만나'처럼 신기할 것도 없다. '일상'은 그저 일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믿는다는 게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나 부정하지 않은 채 현재 내 앞에 있는 이를 사유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이다. 124
- 늘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들을 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 막연한 미래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를 회피하게 된다. 124
-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오셨다(6,38). 하느님은 지금, 내 곁에 빵으로 오셨다. 지금에 대한 사랑과 화해, 그리고 여유가 없으면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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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앙 대 신념(6,41-59)
-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팩트(fact)'는 '하느님이 인간이 될 리 없는 초월적 존재이시다'라는 인간의 철옹성 같은 신념 때문에 무시되거나 억압되었다. 127
- 오히려 예전부터 가져온 우리 신앙의 가치들에 매몰되어, 하느님이 안 계셔도 신앙만 있으면 그만인 것처럼 살아가는 맹신적 행태에 있다. 이를테면 이 시대와 이 사회에 신앙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묻지 않은 채, 성당 가서 미사 드리고 신심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습관적 일이 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신앙과 그 대상인 하느님은 예전 내가 믿어온 바, 교리서에 적혀 있는 바, 딱 그만큼만 이해하는 것이 문제다. 신앙의 대상에게 나아가는 노력보다, 신앙한다는 것이 제 신념의 일부로 치환되어 현실에 계신 하느님보다는 제 신념 안에 우상이 된 하느님을 접하는 데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127-128
- 팩트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은 그 주체와 대상이 하나여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다. 129
- 육화는 팩트이지 신념으로 재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130
-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이라는 팩트에 대한 신앙이 옹졸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게 하려면, 사는 동안 그분의 살과 피를 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이 살아 있는 실체로서 우리 자신과 세상에 참된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 132
- 힐링은 자신에게 맞는 신념을 보듬고 자위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신앙의 투쟁으로 현실의 아픔을 함께 보듬는 데서 진정으로 그 가치를 발한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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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의심하는 믿음(6,60-71)
- 수많은 말을 하고 들으며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하루 동안 주고받는 말들을 살펴보면 매일 거기서 거기다. 그 단순한 말들 속에서 수천수만 갈래로 뻗어나가고 흩어지는 요란한 마음은 잠시도 쉴 틈을 허용치 않는다. 산다는 건, 몸의 한계성에 묶여 있느냐, 아니면 그 구속 너머 새로운 삶의 방식에 열려 있느냐의 문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거나 극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34
- 예수님을 떠나가는 제자들 역시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다만, 거기까지다. 들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아가 실천하는 데 제자들은 힘겨웠다. ... 살아 있음은 낯선 이야기에 대한 반응, 듣는 이의 영을 깨워 육의 익숙함을 걷어치우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마음이 거북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34-135
- 대개 요한복음이 육을 영과 대비시켜 부정적으로 다룬다고들 해석하지만, 요한복음은 육이 꼭 필요한 것임을 말하기도 한다. 적어도 요한복음에서 육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할 유일한 자리이자 방법이었으니까(1,11 참조). 육을 통해 생명이 가능하고(3,16 참조), 육이 죽어야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 복음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135
- 예수님과 함께 걷는 건, 어쩌면 제 삶의 자리에서 해방되는 일일 테다. 제 삶으로 되돌아가는, 제 삶의 익숙함을 선호하는, 그리하여 제 삶에 떨어질 이익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결코 제 삶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136
-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대부분이 떠나가는 상황에서 베드로 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지켜내고 있따. 이를테면, 세상 모두가 예수를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신앙 고백의 주체로 베드로를 소개하는 것이다. 137
- 예수님과 함께 걷고 그분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건, '혐의'를 배제한 순도 100%의 신앙으로만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착각과 편견은 버리자. 신앙 고백은 육의 익숙함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육의 본성적 한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성장한다. 떠남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다. 떠나거나 따르거나 둘 중 하나라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인 듯 타협인 듯 여전히 헷갈리며 세속 논리와 신앙 논리를 식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다. ... 우리의 의지가 악을 향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의 제자로 우리를 부르신다. 138
-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예수님 옆에 있으면 된다. 멋지고 올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스스로를 옥죄고, 예의 바른 이로 하느님 앞에 서 있으려는 교만을 벗어던지는 태도가 오히려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믿음은 제 걸음으로 예수님 옆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과 똑같이 걸어가는 게 아니다. 비틀거리더라도 제 걸음이 삶의 여정을 신앙으로 물들인다. 신앙이 스펙 쌓기가 되면 곤란하다. ... 지금 의심하는 나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이다. 지금의 모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겠나. 의심하면서 성장하는 게 신앙이다. 이심하는 나를 먼저 사랑해야 신앙을 얻는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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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눈뜬 맹인(7,1-52)
-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군중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까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 앎이나 이해의 문제로 인식하곤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인식하는 딱 그만큼, 인간이 알고 이해하는 그만큼 예수님은 드러나고 알려져야 한다. 142
-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알기 위함이 아니라 의탁하기 위함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누구를 믿는다는 건, 그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얼마나 그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와 상응한다. 142-143
- 세상은 저만의 시간을 고집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시간을 견지하신다. 146
- 신앙이 자신의 익숙함으로 향할 때, 우린 '주님'이라 부르되 우상을 향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로 교회 밖 구원의 문제를 부각한 카를 라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내가 믿는 하느님이 우리 욕망의 투사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지우지 말아야 한다. 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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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랑만이... (8,1-11)
- 강남역 사건에서 희생된 '여자'는 '남자'의 혐오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아야 할 '인간'이었다. 149
- 예수님은 단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율법에 비추어 떳떳한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셨다. ... 그분은 여인을,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고 제시한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떠나간 것은 단죄의 주체에서 단죄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기 때문이고, 단죄가 사라진 자리에는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여인'이 홀로 남는다. 152
-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일까. 예수님은 간음이라는 무거운 단죄의 멍에를 짊어진 여인을 그냥 '여인'이라 부르신다(8,10). 이전의 얼크러진 삶을 새하얀 도화지마냥 하얗고 투명하게,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본모습으로 '여인'을 바라보신다. 153
- '나도' 단죄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돌로 치겠다는 사람들의 처지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여인만 용서하시는 게 아니라, 여인을 죽이려 덤벼든 이들과도 화해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참 놀라울 뿐이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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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열린 의심(8,12-30)
- 예수님은 믿는 이의 탄생을 위해 믿지 않는 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신다.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이가 믿는 이가 되며, 빛이 오셨기에 어둠은 빛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어찌 보면 불신앙의 자리가 신앙이 생겨날 좋은 기회의 자리인 셈이다. 156
- 우리는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현혹되어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빛이 세상에 와도, 생명을 주러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도, 우리는 재테크, 자녀 교육, 심지어 오래 살기 위한 건강 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세상살이의 본질이 무엇인지, 세상이란 게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피곤한 것이라 치부한 채, '잘 산다는 것'이 '얼마를 버느냐'는 기준으로 갈무리되기도 한다. 157
-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것은, 제 삶이 전부가 아님을, 그래서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 나아가야 함을 고백할 때 가능하다. 예수님을 보면서 제 삶에 유익한 무언가만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죄에 머무는 것이다. 죄란 특정한 이의 낯설고 불쾌한 행위만이 아니다. 제 것에 눈이 멀어 다른 것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도 죄다. 159
-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살덩이를 이 세상에 내던지셨는데, 우리는 무관심으로 그런 예수님을 하늘에 유폐하는 것은 아닐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식으로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일, 알고 보면 참 쉽다. 의심하면 된다. 묻고 또 물으면 된다. 답을 내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묻는 일, 그 물음 자체로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늘 기억하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길이다. 160-161
- 기억하자.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데서 믿는 이가 탄생한다. 믿음이 있기 위해 우리는 삶을 의심하고 물어야만 한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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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나의 자유(8,31-59)
-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 책임을 불러오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죄의 근본은 '더 먹음직스럽고, 더 유식해질 것 같으며, 더 멋져 보일 것 같은' 것에 대한 개인의 폐쇄적 욕망에서 시작한다(창세 3,6 참조). 욕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현실을 자기 편한 대로 조작하고 편집한다. 165
- 예수님과 하느님은 태초부터 하나였다. 본디 하나를 둘로 갈라놓는 것이 사탄이고 악마이며 거짓이고 살인이다. 갈라지는 건 오로지 제 삶이 기대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몸과 마음을 뺏긴 노예근성 때문이다. ... 한 분 하느님,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다(8,32). 하나 안에 머물러야 자유롭다. 하나를 보고 그 너머 다른 것을 보려는 것은 탐욕이다. 하나를 있는 그대로 하나로 보는 자유, 거기에 순수한 믿음이 있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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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앎의 폭력(9장)
- 평범할수록, 현실을 그대로 용인할수록 그 사회의 기득권은 늘 제 이익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170
-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고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고, 믿음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의 확장이고 증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건, '과거'에 머물러 '지금'을 상실한 데에서 기인한다. 172
- 율법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지 못하는 건,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을 '화석이 된 하느님'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완고함과 폐쇄성에서 해방된 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173
- 죄의 본질은, 깨닫지 못하고 모르는 것을 자신이 가진 얄팍한 지식과 정보로 안다고 우기는 데 있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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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목자이신 예수님(10,1-21)
- "나는 문이다"(10,9) ... 그리스어 '투라'를 '문'으로 번역했는데, '투라'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라,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구원과 풀밭을 불러오는 매개체로 이해될 단어이다(10,9). .. '누구든지' 통할 수 있는 문, ''누구든지'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예수님은 자리매김하신다. 178
- '착함'은 홀로 진실되고 올바른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양들을 알고 양들과 함께 지내는 '연대'의 가치를 지닌다. ... 예수님이 양들을 알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서 우리 신앙인들 틈에서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179
- 예수님은 그렇게 땅이 하나 되고, 그 땅이 하늘과 하나 되는 '연대'의 길을 당신 십자가의 순간까지 지속해서 만들어 나가실 것이다. 180
- 신앙이란 게 별건가. 다투지 않고 갈라 세우지 않고, 조금씩 양보하며 서로를 보듬는 게 신앙 아닌가. 사실, 그게 힘들다. 옳고 그름이 명백히 내 안에 자리잡고 있고, 그 옳고 그름에 대한 나의 기준이 참으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옹졸함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목자요 임금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정보의 유무나 그분에 대한 믿음의 깊이 정도에 달려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서로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예수님은 목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이런 서로를 향한 애틋한 관심과 지향성을 '회개'라고 부른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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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떠남(10,22-39)
- '분명히 말해 달라'는 것은 어찌 보면, '내 마음에 쏙 들게 말해달라', '나를 위해 말해달라'는 자기중심적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185
- 믿는 이들의 작업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받아들이고 제 삶 안에서 사유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또 묻는 것이다. 186
- 양, 예수님, 아버지가 '손'이라는 형상 안에서 친교를 이룬다(10,30). 믿음이란 그 '손' 안에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유다인들은 성전을 봉헌했어도 하느님의 '손'에 들지 않았따. 그들은 건물로 하느님을 찾았고, 건물로 하느님을 잃었으며, 다시 건물로 하느님을 되찾았노라 기념하고 축하했을 뿐이다. 186
- 예수님의 의도는 빛이 독보적 존재로서 가치를 뽐내는 데 있지 않다. 어둠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어둠을 품어안는 게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온 이유다.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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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믿음과 삶(11장)
- 라자로 이야기의 목적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다는 초자연적 사건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 말씀하시는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데 있다. 193
- 하느님은 죽음과 생명이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으로, 서슬 퍼런 심판으로 불의와 정의를 냉혹하게 가르는 것으로 영광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서로 보듬고, 서로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의 영광은 드러난다. 죽음의 자리라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영광이 라자로의 소생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나려 한다. 193-194
- 대개 '지금'을 예수님이 이미 주신 생명의 사간으로 인식하지 않는 건, 세상을 살아내는 데 지치거나 힘들어서,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은 내일'을 갈망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의 삶이 힘든 건, 생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을 함께 살아낼 희망이 없어서가 아닐까. 지금 아파하며 죽어가는 이를 쳐다볼 여유가 없어서가 아닐까. 그저 내일을 각자의 방식으로 계획하기에 바빠서 지금을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196-197
- 라자로의 이야기는 믿음으로 생명을 꾸려가야 함을, 생명이 곧 믿음의 현장임을 깨닫는 자리다. 각자가 만나는 예수님은 다를지라도, 그 예수님을 통해 지금의 제 삶을 무시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라자로를 통해 기억해야 한다. 사는 건 믿는 것이되, 믿음이 지금 삶이 아닌 다른 곳을 지향한다면 여전히 지금 여기에 오신 예수님을 가로막거나 죽이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삶을 묻고 따져서, 도대체 무슨 일이, 무슨 뜻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빚어지는지 알아가는 비판적 사랑이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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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To Be or Not To Be(12,1-36)
- 마리아의 행동은 온전히 예수님께 집중된 반면, 유다의 계산은 향유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된다. 유다는 자신과 예수님 사이에 삼백 데나리온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장벽을 세워 놓았다. ... 향유 냄새는 집 안 가득 퍼졌다. 유다의 셈법도, 주위의 불편한 시선도 향유 냄새를 막지 못한다. 향유는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고, 그 냄새가 퍼져나간 건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열정이 온 집 안에 가득 찬 것과 같다. 202
- 라자로가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잔치에 예수님의 죽음을 겹쳐놓는 요한복음의 편집에 주목하자. 요한복음의 독보적 가치는 이러한 역설적 편집에서 도드라진다. 마리아의 도유는 죽음의 시간을 향해 있지만, 그 죽음의 시간이 곧 생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은 강한 여운을 남긴다. 203
- 예수님은 삶을 완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삶의 마감이 생명이 되는 건,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닌 해방을 통해 가능하다. 해방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과 이기적 계산을 부끄럽게 한다. 207-208
-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내가 나로서 있느냐, 아니면 부수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있느냐의 문제다. 예수님은 순전히 당신 자신으로 서 계셨다. 그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가.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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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모한 이성(12,37-50)
- 대개 인간의 완고함은 무지나 오해, 또는 신념에 근거하지 않는다. 완고함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른 제 앞날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한다(12,42). 제 이익에 흠이 갈 때, 완고함은 극에 달한다. 213
- 믿음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단순함과 사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그래서 누가 되었건 함께하고픈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215
- 유다인들이 완고한 건 그들의 계산이 이원론적이었다는 데 있다. 216
- 따져보고 만져보고 확인해야 하는 이성과는 다른 이성, 그러니까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요한복음이 요구하는 이성이다. 그렇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성은, 제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능력, 제 가치관을 한층 합리적으로 세련되게 가꾸는 능력, 알아듣지 못하는 이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언변과 지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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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랑과 배신(13,1-30)
- 당신이 죽으실 줄 알면서도 유다를 그냥 둔다는 것은,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히 맞서는 것이다. 221
- 서로에 대한 배려는 서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지, 겸손으로 포장하여 무작정 부추기는 희생이나 극기와는 다르다. 224
-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는 단순히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역사적 존재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제 삶의 자리를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된 자리로 만들어가는 이다.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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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예수님의 고별사(13,31-14,31)
- 십자가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모든 신앙인이 서로 만나 사랑의 실천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하나의 약속이고 희망이며 설렘이다. 229
-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그 현존 안에 세상 어떤 것도 흉내내지 못하는 궁극의 사랑이 살아 숨 쉰다. 230
- 요한복음의 저자는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떠난 예수님이 실은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육체의 부재가 존재 자체의 부재가 아님을 강변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인들 사이에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했다. 230-231
- 예수님의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 '떠남'으로써 '기다림'이라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231
- 예수님이 만들어주실 신앙인의 거처는 시간이나 공간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신앙인 서로 간의 사랑 안에 녹여내는 일이어야 했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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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예수님의 고별사 2 (15,1-16,33)
- 사랑은 제 의지의 확장이나 제 호감의 표현이 아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계명을 지켜야 하는 숙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지닌 얼마간의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240
- 서로가 만나는 자리는 위와 아래, 높음과 낮음이 있을 수 없다. '친구'로서 있는 듯 없는 듯해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고 그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불편함도 웃어넘기며, 애써 하나인 듯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가 되어버려 뭐든 품어줄 수 있는 자리가 계명의 자리고 사랑의 자리다(15,15-16)
- 믿음의 길은 앎을 체득하는 길이 아니라,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는 비움의 길이다.(필리 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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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예수님의 기도(17,1-26)
- 예수님의 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누리는 '일치'로 제자들을 불러주십사 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거룩해지도록 비는 것이다. 249
- '거룩함'은 성속을 갈라 속된 것을 제거한 후, 성스러움만 움켜쥐겠다는 제례적, 윤리적, 규범적 편협성이 아니다. 이 세상의 민낯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속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증거자의 결기와 하느님의 사랑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관계의 예술이다. 매 순간, 어느 장소에서라도 하느님이 함께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자세, 제 신념과 가치관이 전부인 양 떠들지 않는, 그래서 열린 마음과 정신과 태도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과 갈등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단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름받은 증거로 제 삶을 세상에 내놓는 자세,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비는 '거룩함'이다.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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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수난받는 하느님(18,1-38)
- 어둠이 빛을 가장하고 참된 빛이 어둠에 의해 붙잡히는 상황은 빛과 어둠의 대립이 아니라 참된 빛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어둠은 빛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빛을 필요로 한다. 빛이 있어야만 어둠이 존재할 수 있고, 어둠을 통해 빛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통합적 사고로 우리를 인도한다. 256
- 진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투명함이 아닐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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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랑의 승리(18,39-19,42)
- 예수님이 묻히는 것은 그분이 참으로 인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참된 인간, 죽음조차 비껴가지 못하는 인간이 된 하느님이, 참으로 인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죽고 묻혔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인간이 가장 처참한 자리에서 하나 되는 일치의 사건이 된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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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발견(20,1-31)
-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무엇을 찾는 것, 나는 그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발견이다. 인간이 제 힘으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그려진다. 272
- 제 지식과 신념에 묶인 채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인식의 굴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274
- 죽음의 반대가 부활이 아니고, 세상의 반대가 교회가 아니며, 악과의 적대적 대립이 선이 아니다. 예수님의 발현은 세상의 이원론적 대립을 무너뜨린다. 부활은 죽음 안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악은 선을 향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당신의 밣현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편을 나누는 세상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태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 모든 것 안에서 조화를 지향하고, 모든 것이 조화로울 수 있도록 관리하며 살아갔던 인간의 본디 모습은 회복되어야 한다(창세 1,26-2,8 참조). 276
- 매일 일상적으로 걷던 길에 낯선 무엇이 보이면 우린 놀란다. 그것이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에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사실에 더 놀라기도 한다. 부활은 이미 오래전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존재했으나, 늘 새롭게 다가오는 실체다.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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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또다시 사랑(21,1-25)
- '사랑'이라는 말마디를 두고 아가페적이니 인간적이니, 또 아니면 플라토닉 러브니 육체적 사랑이니 하면서 '사랑'의 여러 의미를 끄집어내어, 예수님이 요구하신 사랑이 다른 사랑과 비교 우위에 있음을 굳이 강조하는 버릇이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 횡행한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정신적 사랑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손이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랑이다. 283
- 사랑의 길은 굳이 사랑하는 이가 함께 있지 않아도 홀로 걸을 수 있는 용기 있는 길이다. 이미 삶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었으니 사랑의 길은 혼자 있어도 늘 함께 걷는 길이 된다. 284
-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비교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호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사유를 기본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신앙심이 더 깊어지거나, 신앙의 모범에 맞갖게 살고자 하는 태도는 실은 각자도생하겠다는 제 욕심이지 하느님께 나아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다. 이미 오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또다시 자기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285
- 예수님을 살리는 길은, 또다시 사랑이다. 사랑하면 열리고 사랑하면 듣는다. 그게 전부다. 사랑하자, 사랑하자, 그럼에도 어찌 되었건 또다시 사랑하자. 28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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