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더불어 살기/밑줄 긋기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에서

종이-배 2018. 4. 28. 16:39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시공사/ 2013


-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울림을 느낀다. 그런데 종교가 있으면 그 울림에 대해 지속적이고 일관된 반응과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 종교는 자신의 영혼을 통해 삶을 반성하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일관되게 보다 나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자유로운 힘이다. ... 예수는 아주 쉬운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정의로운 힘으로 행동했다. 그 복음을 새기고 그 행동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12-13)


- "예수가 금지한 것을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하지 말라!"... 예수는 이미 그 존재 자체로 완전하다. 그래서 때론 불완전한 우리와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만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어서 우리의 삶도 그들처럼 변화할 것을 느끼고 각오도 새롭게 다듬게 된다.(14)


-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떠나 작고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말에 귀기울여야겠다. "정치적 중립은 가치중립적으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사람 곁에 있는 것입니다."(35)


-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나라를 특정한 공간에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전제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공간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죽고 나서' 땅이 아닌 하늘에서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땅 위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 그 이후에 대한 보상적 대안에 집착하는 것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이승에서의 힘든 삶에 대한 절망조차 '하늘에 있는' 낙원에서의 완전한 풍요와 영생의 꿈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적 존재 유무를 떠나 지나치게 그런 보상적 혹은 보험적 성격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는 건전한 신앙이라기보다는 자칫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보게 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공간적, 대안적 의미로서의 하느님나라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실천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54)


- 하느님나라는 한 번의 약속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삶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믿는 것'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안다'는 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음을 뜻한다. '안다'는 것은 성경을 두루 꿰고 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알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한다. 그러니 믿음에는 근원적으로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61)


- 본질은 그 물을 마시는 게 아니라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산에 오르면서 운동하는 것이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그저 듣고 머릿속에 담아두는 게 믿음이 아니다. 그건 거짓된 믿음이다. 믿음도 아니고 환영일 뿐이다.(64)


- 나는 교리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모호하거나 복잡하면 '단순하게 더욱 단순하게simpler and simpler' '근본으로 돌아가는return to the basic' 방법을 따른다.(76)


- 유혹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무엇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82)


- 기도는 하느님께 제출하는 '주문요청서'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춤없이 드러내며 약한 자신을 강하게 이끌어 달라는 청원이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느님께 묻고 그 답을 얻는 것이다.(89)


- 예수의 모든 기적이 그렇겠지만, 특히 이 첫 번째 기적은 그런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준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청맹과니와 다르지 않다. 나의 원칙과 절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을 깨달을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걸 이 짧은 대목에서 만나게 된다.(105)


-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예수를 따라나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위도 지식도 재산도 별로 없는 그였기에 기꺼이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집착이 작았다는 점이다. 누구나 자신의 소유를 비우는 건 어렵다. 집착이 좋게 나타나면 열정이 될 수 있겠지만 지나치면 허물을 빚어낸다. 오로지 자신의 성취에만 매달린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꼭 집착이 덜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나 그런 집착은 있다. 문제는 그 집착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비울 수 없고, 빈 공간이 없으면 새로운 것, 특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과연 내가 지금 제대로 베드로를 따르고 닮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119)


-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차이와 차별의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차이의 어느 한쪽에 반복적으로 열등감을 심어주는 행위가 이어지면서 저절로 차별이 생겨났다고 말했다.(138)


- 사람은 제각기 서 있는 곳에 따라서 세상을 다르게 보며 산다.(147)


- 포도밭 주인이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한 것은 노동 단위 시간당 얼마라는 근거로 한 셈법이 아니라 누구나 최소한 생계는 해결해줘야 한다는 상징적 비유다. ... 가장 늦게 온 사람에게도 삶의 방편은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이 비유의 참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158)


- 포도밭 주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르침은 바로 측은지심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행복해진다.(161)


- 타락의 임계점은 결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던 것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삿된 일이 행해지는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아니, 독이 될 뿐이다. 해독제도 없는 독이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자신들은 여전히 빛과 소금인 줄 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건 바로 자신이 양인 줄 착각하는 늑대다.(179)


-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참된 우정에는 아무런 셈도 이해타산도 없다. 나의 기쁨보다 친구의 기쁨을 더 먼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쁨이다.... 사랑은, 우정은 (192)


-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일어나 모두가 온전한 인격체로 설 수 있게 해주는 그 일들이 바로 기적이다.(205)


- 모든 이를 정당한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의 본질이다.(207)


- 산에 오르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어도 산을 오르며 그 산과 대화하고 자신의 전존재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면 그 사람이 그 산에 제대로 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 산을 초모룽마라고 부르건 에베레스트라 부르건 주무랑마라고 부르건, 그건 사람ㄹ들의 처지와 편의에 따른 것이지 이름에 따라 산의 본질이나 존재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부르는 이름만, 내가 오르는 등반로만 절대 유일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224)


- 그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랬을 것이다. 예수 기적의 바탕인 바로 그 마음이다. 그것이 바로 맹자의 측은지심이고 예수의 사랑이다. 그래서 '가까이' 갔다. '마음의 거리가 줄어드는' 건 바로 동정과 공감이다. 그게 소통이다. 말로만 마음으로만, 혹은 머리로만 통하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가야 서로 통한다.(234)


- '하느님나라'는 특정 공간 개념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정신과 방향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완성된 왕국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삶의 양식'이다.(260)


-  참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결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아니, 그 행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 자체가 이미 행복이라고 해야 한다.(261)


-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모할 때, 그리움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하고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때 무슨 말을 하는가? "사랑해." 그 말이 때로는 진부해서 아무리 다른 근사한 말을 찾으려 해도 그 이상의 말을 찾을 수 없어서 '행복하게 난감한' 경우가 없었는가? 백 번을 말해도 천 번을 들어도 그 말은 항상 똑같은 의미와 힘으로 작용한다. 사랑한다는 말 이외에 그 어떤 말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주의 기도>는 바로 그런 '사랑'이 아닐까?(263)


- 거듭 말하거니와,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예수는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 몸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 부끄럽고 탐욕적이며 사악한 나, 실천하지 못하고 공염불만 되뇌는 내가 죽어야 한다. ... 그러나 죽는 것은 참 어렵다. 나와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 그런지 쉬이 내놓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는 것이 나 자신이다.(295)


- 성서를 읽는 것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성서를 달달 외운다고, 그 구절을 많이 안다고 하느님나라에 가는 것도 아니다. 성서를 읽는 것 또한 적어도 그 순간만큼 나 자신을 죽이는 시간이어야 한다. ...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I am not what I used to be(옛날의 내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296)


- 복음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의 강령이다.(34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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