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더불어 살기/밑줄 긋기

[예수전]에서

종이-배 2018. 4. 7. 19:08

<예수전> 김규항 / 돌베개


<고래가 그랬어> 편집자라고만 알고 있던 김규항 씨가 이런 책을 냈었구나. 박병규 신부님이 이 책을 읽고 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노라는 글을 읽고 구입하여 읽어보았다. 마르코복음 필사하면서 읽으니 진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복음이 우리 삶에서 살아숨쉬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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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가, 인간으로서 존경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예수는 우리가 삶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 한 곳에 머물며 구체적인 사회상을 구현하려 하기보다는 내내 인민들의 삶의 현장을 돌다 미완의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삶의 방향과 결의 지독한 일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구체적인 사회상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건져 올리게 한다. 예수는 새로운 사회의 실체는 그 체제나 법 같은 형식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삶의 방향과 결에 있음을 되새겨 준다. 그래서 그의 미완은 우리에게로, 우리의 미래로 한껏 열려 있다.(12-13)


- 물론 2천년 전 예수와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사용했던 아람어엔 존댓말 반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처럼 존댓말 반말이 엄격하고 또 매우 섬세한 사회적 맥락을 갖는 사회에서 예수를 '아무한테든, 대제사장에게든 로마 총독에게는 무턱대고 반말을 하는 사내'로 그리는 건, 게다가 그런 예수에게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이 존댓말을 하는 것처럼 그리는 건 대단한 왜곡이 된다.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13)


- 예수는 분명히 유다 사람이 아니라 갈릴래아 사람이다.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메시아이되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예고된 것이다.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24)


-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25)


- 예수가 말한 '회개'를 단지 종교적 회심回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예수는 자신의 종교라 할 유대교 안에서 회심하라는 게 아니며, 아직 생기지도 않은 기독교 안에서 회심하라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예수는 종교적 회심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회심을 촉구한다.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29)


- 분명한 건 두 사람이 결국 예수를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떠나는 순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제 노동과 일상을 지속하다, 약속한 시간 예수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두말없이 길을 나선다.(30)


- '권위 있다'는 말은 민주적이지 않은 어떤 억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분명한 존중이나 신뢰를 말한다.(31)


-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예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비로소 율법의 굴레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인민들과 만났다. 하느님이 그런 분이셨다니! 인민들은 경탄하며 예수의 가르침에 기꺼이 '권위'를 부여한다.(32)


- 귀신이 들렸다는 건 뭔가? 사람이 어떤 다른 정신에 장악되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 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35)


-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종교적 천국으로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선교나 전도로만, 기도를 종교적 간구로만 이해하는 건 본의 아니게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37)


-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39)


- 예수는 기쁜 얼굴로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 이제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세요. 하느님은 당신 편입니다.'(40)


- 훌륭한 바링사이인들 덕에 인민들은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런 현실을 체념했다 ...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인'은 누구인가? 사랑과 존경마저 돈으로 사고 팔리는 이 완전한 물신의 세상에서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49)


-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식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천박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의 식탁에서 비로소 인권을 가진 한 인간이 되었다. 예수의 식탁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위계는 모조리 전복되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식탁은 '선취된' 하느님 나라의 풍경이었다.(51)


-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59)


-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 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 가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63-64)


-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없이 유순하기만 한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65)


-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66)


-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68)


-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69)


- 어릴 적부터 노동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맡아 온 착한 맏아들에 대한 연민, 다른 가족들마저 미쳤다고 말하지만, 또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속으로 낳고 기른 어미이기에 직감할 수 있는 아들의 진지하고 존귀한 신념, 그리고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그러나 필시 아들에게 닥쳐올 위험과 고난 등에 대한 생각으로 어머니는 번민한다.(70)


-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시오." 예수의 말엔 그 사실에 대한 씁쓸함과 한 사람이라도 더 마음의 귀를 열어줄 것을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이 함께 배어 있다.(74)


-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작고 보잘것없다.(79)


-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80)


- 예수는 대개 많은 사람에게 제한 없이 말하지만, 동시에 변화는 들을 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들을 집중해서 가르친다.(81)


- 어떤 게 더 큰 이적인가?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는 것. 예수는 진정한 이적, 더 큰 이적을 요구한다.(82)


-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적인 변혁을 포함했다. 그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지 않았을 뿐.(87)


- 예수에겐, 내가 아니라 하느님, 내가 아니라 인민, 그리고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민이 만나는 일만이 중요했다.(91)


-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를 연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92)


- 치유 이적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편린이다.(93)


-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을수록 영적 자유는 적어진다. ...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두 고르게 갖게 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99)


- 우리는 중립적인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마몬의 체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으며, 애써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한 매우 자연스럽게 마몬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102)


-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110)


- 사람들은 대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112)


-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117)


- 권위주츼 체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아이와 여자와 하급자에게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오늘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에 사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놓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회체제에 얼마간 불만이 있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121)


-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123)


- 믿음이란 일방적인 간구가 아니라 나와 하느님과의 상호소통이며, 하느님은 힘세고 잘난 사람들 편이 아니라 약하고 보잘것없는 내 편이며 나를 도우실 거라는 확신이다. 그런 작은 힘들의 연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충만이다. 믿음의 주체는 '나'이며 기도는 그 믿음을 일상화하며 풍성하게 키우는, 우주의 기운을 불러 모으는 행위이다.(146)


-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처럼 세상을 바꾸는 운동엔 언제나 노선 갈등이 존재한다. (150)


-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162)


-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간다.(165)


- 개인의 온전한 변화가 생략된 변화는 반드시 한계와 문제를 드러내고 만다.(168)


-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그런 혁명을 바란다.(169)


- '좋은 지배'를 꿈꾸지 마라,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섬김만이 있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고 싶다면 섬겨라, 가장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함께 하라.(172)


- 예수는 이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라는 것, 이적이란 '나와 하느님의 소통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173)


-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 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 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180)


- 오늘 지구에선 해마다 600만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지나치게 먹어 다시 돈과 시간을 들여 살을 빼며, 산더미 같은 음식 쓰레기를 서로에게 떠넘기려 다투는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열심히 믿을 테니 더 많은 물질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느님이 축복하겠는가?(184)


- 예수는 부자 청년 에피소드에서처럼 남보다 많이 갖는 게 축복이 아니라 내 것을 없애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게 축복이라고 말한다. ...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 교회나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 한 방식일 순 있지만, 유일하거나 완전한 방식은 아니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교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온 세상에 관련하며 온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준비하는 존재다.(185)


-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187-188)


-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189)


-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다.(196)


- 천사는 세포덩어리가 아니다. 그래서 천사는 수명이 없이 살아 소통한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세포덩어리인 몸을 떠나 영원히 살아 소통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이다.(198)


-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라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202)


-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 존재한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203)


-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과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205)


- 사람의 삶엔 수치로 계량할 수 없는 절절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예수는 임박한 수난과 죽음 앞에서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고독과 두려움에 번민한다. 여자는 그런 예수에게 최대한의 존경심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마치 엄마가 죽음을 앞둔 아이를 품듯이, 온 마음을 다해 위로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220)


- '남의 생각'은 결국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230)


-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는 비범한 사람으로 두 가지 유형을 알고 있다. 전사와 도사. ... 예수는 우리에게 비범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의 본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범한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모두 무쇠처럼 강한 전사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공포와 번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쇠처럼 강해진다는 건 무쇠처럼 무디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 또한 예수는 우리에게 도사가 되라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공포와 번민을 낳는 '색의 세계'를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감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경지는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다. ... 우리는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신적일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신적일 수 있다.(234-235)


-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238)


- 그들은 겁이 나서 도망친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은 진작 스승을 떠났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의 곁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스승이 체포되자 비로소 그들은 흩어진다.(240)


-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과 "죽여라!"를 외치던 군중은 실은 다른 군중인 것이다.(247)


- 그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쉰 예수보다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예수,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를 선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249)


-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 영성가, 비폭력주의자, 하느님의 아들 등등. 그런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55)


- 지배체제의 직간접적 탄압과 주류 사회에서의 배제,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에게서(심지어 같은 길을 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일어나는 오해와 곤경은 다르지 않다. 지배체제와 불화화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256)


- 물론 오늘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해서 그의 인간적 가치를 폄훼하지 않겠지만, 예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행실'은 그 여성의 인간적 가치의 전부였다. '마리아는 창녀'라는 루머 하나로 간단하게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제자가 파멸했던 것이다.(258)


-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261)


- 사람은 대개 육체를 사용하는 시간을 목숨이 유지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한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 빠지게 한다. 금방이라도 인생이 지나가 버릴까 아쉬워, 혹은 반대로 인생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작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육체의 목숨은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고, 육체의 목숨에 연연하면 진정한 목숨을 영원히 잃고 만다고 말한다.(262)


-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264)


2018년 3월 31일 다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