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8일 일요일/ 사순 제1주일
지난 주 수요일. 재의 수요일 미사를 참례하면서, 내내 분심 잡념에 시달렸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을 사탄이 알아챘는지, 평소보다 더 혼란스럽게 나를 뒤집어놓았던 것 같다.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올해 사순절에는 어떻게 살아야 '제자살이'가 될 수 있는지를 묵상했다. 의지는 약하기 그지없고, 사람됨은 찌질하기 짝이 없고, 걱정은 태산이고, 두려움은 마음속 한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의 나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힘들었다.
어쨌거나 앞으로 이렇게 얼마나 내게 이 땅에서 지낼 시간을 더 주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사순절을 맞게 되었고, 이번 사순절에는 무엇을 묵상하면서 긴 시간을 보낼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사순절의 사십 일을 긴 십자가의 길로 생각해 보자는 것.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멈출지 모르겠으나, 1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의 길을 내 삶으로 따라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작한 제1처.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선고를 받는다는 것'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무겁던 것이던가.
'선고'라는 말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흔히, 함부로 쓰이는 말도 아니다. 내가 언제 '선고를 받았나?' 하고 떠올려보니,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아픔들이 콕콕 찌르면서 수면으로 떠오른다. 엄마의 사망선고, 시어머니의 암 진단 선고, 내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내 아이의 장애판정 선고, 직장에서 받았던 해고 통고,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것이 좋겠다던 의사의 진료도 내게는 무서운 선고나 다름없었다. 선고를 들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어쩌면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두려워하면서 기다렸던 불안한 시간들이 더 힘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한편, 선고는 이제 '받아들임'을 결정해야 하는 것 외에는 사람으로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그래서 어쩌면 매우 피동적인 은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그러셨을까. 몇 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운명의 그림자, 오늘 복음에 나온 것처럼 이미 광야에 섰을 때부터 당하기 시작했던 유혹을 어쩌면 이 사형선고로 마침내 끊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안하고 두렵던 시간이 차라리 이 선고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깊은 평화로 가는 첫 발자국이 된 것은 아닐까. 내 편, 네 편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앞으로 마셔야 할 잔, 가야 할 길이 보인다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된 것은 아닐까. 자포자기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보여주셨으니 차라리 개운하게, 시원하게 따라가겠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으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그 분을 오히려 담담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러기에 어쩌면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죽음을 넘어 부활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십자가의 길, 제1처는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라기보다는, 예수, 죽음을 받아들이심을 묵상합시다,라고 시작하는 것이 더 내 삶과 가까운 말이 아닐까, 싶은... 지금 상황으로는, 내가 사형선고를 받을 확률보다는, 아파서 죽든 갑자기 죽든 이 땅에서 삶을 마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확률이 더 클 것 같으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걷게 될 예수님의 길은 어떻게 전개될까. 나도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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