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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뿌리 내리기와 상호작용 높이기

종이-배 2016. 12. 4. 07:17

뿌리 내리기와 상호작용 높이기

_교육운동, 한 걸음 더 나아가기


현병호(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뿌리 내리기


“이게 나라냐!” 박근혜정부의 국기문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집권 세력의 무능과 부패가 결정적이지만, 이런 일이 가능한 사회적 토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나라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게 마을이냐?” “이게 집이냐?”라는 물음을 함께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겐 과연 집이 있는가. 또는 어떤 집을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실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마을 만들기도 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집에 대해서는 과연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빠져 있지는 않았냐는 거예요. 저는 집을 건너뛰고 마을, 건너뛰고 사회, 건너뛰고 국가로 갔다고 생각해요.


집과 마을은 구체적인 장소성을 갖는다. 특정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집과 마을은 공허하다.(그런 의미에서 네트워크는 마을이 되기 어려운 본질적인 한계를 갖는다.)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근대를 관통하는 특징으로 ‘뿌리 없음’, 곧 특정 장소로부터 뿌리 뽑힘을 든다. 여기나 저기나 다름없다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상관없다면 우리는 거기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잘 해야 거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 

근대화의 본질은 표준화다. 표준화는 개체의 고유성을 낮추고 유동성을 높인다. 모든 것을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표준화의 궁극적인 기능이다. 화폐는 모든 것을 대체가능한 것으로 균질화시킨다. 값이 같으면 가치도 동일한 것이 된다. 아파트는 주거의 표준화를 구현했다. 평당 가격이 같으면 같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시세차익을 위해 이 아파트 팔고 저 아파트 사는 것이 재테크 수완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집은 삶터가 아니라 부동산일 따름이다. 

대도시의 경우 전체 주거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70%를 넘는다. 아파트라는 주거문화가 우리 삶과 교육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공간은 그 나름의 내용을 만들어낸다. 공간이 구획된 것처럼 저마다 개인 생활에 여념이 없는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밥을 먹으려면 회식 날짜를 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생활 현실이다. 

집이 다만 임시 숙소에 지나지 않으면 거기에 뿌리를 내리기는 힘들다.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관심이 자랄 수 없다. 가까이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 풀과 나무들을 알고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정서적 토대가 된다. 관심과 보살핌은 스쳐지나가는 관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이런 애정에 기초한 관계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뿌리 내리기’야말로 집과 마을의 출발점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뿌리가 약한 것도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 시세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지역과 공동체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때 민주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의사결정 능력 기르기


대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은 삶과 교육의 일치를 지향한다. 때문에 많은 대안학교들이 마을학교를 지향하지만 대부분 ‘마을 따로, 학교 따로’인 게 현실이다. 기존 학교에 비해서는 마을과 학교의 경계가 희미하고 교류도 활발한 편이지만 학교 꼴을 갖춘 곳일수록 ‘학교 따로’ 현상이 나타난다. ‘전용’ 공간이 있고, ‘전업’ 교사와 ‘전업’ 학생들이 있으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현상이다. 

방과후학교조차 그렇다. 이제는 방과 후에도 아이들은 정해진 공간과 사람들, 프로그램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옛날 아이들은 방과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그날그날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거나 골목에 모여서 놀거나 혼자 뭔가를 하거나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심심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심심함도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방과 후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사결정 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여하튼 놀기 위해서는 개인적 의사결정과 집단적 의사결정을 부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 한 가지는 의사결정을 힘들어 하는 것이다. 이거 해도 돼요. 저거 해도 돼요... 어울려 마음껏 놀지 못하고 정해진 스케줄대로만 움직이는 아이들, 저마다 왕자 공주로 자라난 아이들이 꾸려가게 될 미래 사회가 제대로 굴러 갈까. 의사결정 능력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개인 수준과 마을 수준, 국가 수준의 의사결정 능력이 요구된다. 일반학교든 대안학교든 또는 학교태가 아닌 배움터든 이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사결정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팀 안에서 상호작용이 활발해야 한다.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지만 너무 작은 학교는 상호작용의 총량이 적다. 축구팀도 구성할 수 없는 인원으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데는 드리볼 능력보다 패스 능력이 더 필요하다. 개인 역량보다 팀 역량,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패스를 잘 하는 아이를 길러내기 위해 어떤 교육 모델, 삶의 모델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축구를 하면서 가다듬은 의사소통 구조와 조직운영 경험이 나중에 남아공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호작용을 높이는 것이 교육 환경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다. 학교는 다양한 아이들을 한데 모아놓음으로써 그 면에서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운영하기에 따라 편차치가 크긴 하지만 근대사회가 고안해낸 상당히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은 분명하다. 부족사회에 어울리는 서당 시스템으로는 근대사회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탈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근대학교 시스템이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환경은 어떤 것일까. 


대안적 인맥 또는 네트워크 만들기


사람 노릇 하려면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밑바탕에는 학교라는 집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인간관계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 믿음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만큼 부정하기 어렵다. 오늘날 학교만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가깝게 사귈 수 있는 장도 없다. 학교라는 시스템은 그 집단에 들기만 해도 일정 정도 인맥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횡적 종적 연대가 저절로 구축된다. 이른바 명문학교를 선호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동기들뿐만 아니라 위아래로 막강한 선후배들의 네트워크에 편승해서 그 집단의 힘을 빌기 위해서다. 인간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를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 

대안학교도 또 하나의 학연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학교 출신들이 사회에서 잘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학연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생겨난 끈끈한 인간관계의 힘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부모들이 이름 있는 학교를 선호하는 데는 내심 그런 것을 기대하는 심리도 작용할 것이다. 장차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은 부모들의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다. 설령 장래의 인맥 관리를 계산한 그런 ‘꿍꿍이’가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과 그런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우정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요소이고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대안학교가 일반학교에 비해 좋은 점은 무엇보다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학교 분위기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우정이 장래에 때로는 학연으로 작용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홈스쿨링을 비롯해 학교 밖 배움터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만남의 장, 활발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관계망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서로를 이용하는 인맥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인맥, 또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학벌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들의 네트워크에 맞설 만한 대안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힘의 구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를 넘어선 배움과 삶의 연대망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인적 물적 환경이 필요하다. 이런 네트워크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부모와 교사들이 손을 잡고서 주변에서 하나둘 만들어가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IT기술은 여기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흩어져 있는 점들을 이어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만들어보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다양한 네트워크와 인맥들을 활용할 수도 있다. 학교에 비해 종적 연대가 약한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하다. 선후배, 스승과 제자, 어른과 아이들 간에 긴밀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으려면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이는 학교밖 배움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소통’의 시대로 접어들어


표준화는 일시적으로 획일화를 가져오지만,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상호작용의 총량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다양성을 낳는다. 아이러니하지만 내재된 법칙이다. 대량생산 체제가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바뀐다. 경제 시스템에 비해 교육 시스템은 변화가 느리지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부족사회에서 근대국가를 거쳐 지구촌 시대로 접어들면서 빠르게 상호작용 총량이 높아지고 있다. 교육 시스템 또한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웨이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학교의 미래, 교육의 미래를 생각할 때 유념할 문제다. 부족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서당식 교육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서당식 교육의 장점은 취할 수 있지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요구된다. 근대학교 시스템보다 더 상호작용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근대학교는 서당에 비해 상호작용이 훨씬 활발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표준화의 압력이 더 강했던 까닭에 한편으로는 상호작용을 억누르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아이들을 나이별로 나누고, 교과목을 나누고, 교실 공간을 나누고, 수업 시간을 나누고, 우열반을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었다. 

표준화의 압력이 약해짐에 따라 교육은 점점 통합과 통섭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무학년제, 통합교과, 열린교실, 협동학습, 모두가 상호작용을 높이는 방향이다. 그 속에서 의사소통 능력이 길러진다. 소통력은 미래교육에서 가장 주요한 키워드의 하나일 것이다. 사회의 진화 방향이 있다면 소통의 총량을 높이는 쪽이다. 미래사회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변화가 빠르고 그만큼 상호작용의 총량이 늘어날 거라는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 그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소통력일 것이다. 이는 사실 아이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하다. 

소통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 시스템과 내용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홀로 살 수 없듯이 소통력 또한 혼자서는 기를 수 없는 능력이다.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소통력이 길러지고 배움 또한 넓고 깊어진다. 근대학교의 유효기간은 이미 지났다. 학교 틀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상호작용이 활발해질 수 있는 적정 규모의 학교를 만들고, 학교와 학교 밖의 상호작용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크고 작은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중첩될수록 상호작용이 활발해진다. 학교를 넘어 마을로, 마을을 넘어 지역사회와 세계로 가지를 뻗어야 한다. 

소통을 개인적인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보면 안테나 감도를 높인다거나 듣기 능력을 강화하면 되겠지만, 소통은 개인의 자질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갑질 하는 인간은 그 인격이 후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그것을 용인하기 때문이다. 구조가 잘못 세팅되면 잉꼬부부 간에도 소통이 힘들다. 가부장 구조에서 남녀가 제대로 소통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협력 관계냐 경쟁 관계냐에 따라 소통의 질은 달라진다. 협동학습 방식이 소통능력을 키우는 데 더 나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소통은 단순히 개인의 자질 함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계발을 강조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듯이 마음공부 같은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소통 문제를 개인의 자질 문제로 축소시킨다.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소통지수를 높이는 길이다. 근대사회는 신분제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제도화함으로써 소통지수를 끌어올렸다. 부패와 소통지수는 반비례하고, 민주화와 소통지수는 비례한다. 통하지 않으면 썩는다. 불통사회일수록 부패지수가 높은 법이다. 세월호 참사도 박근혜 게이트도 결국 불통사회의 결과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


소통이 원활하려면 일단 상호작용 총량을 높여야 한다. 농경사회는 도덕경이 예찬하듯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이웃마을과도 잘 소통하지 않는 폐쇄성을 띠고 있다. 다행히 한국사회는 농경사회 요소와 유목사회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뿌리와 날개가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산업화,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유목사회 요소가 깨어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망과 인터넷 통신망을 갖추었다. 상호작용을 촉진할 수 있는 하드웨어는 최상급인 셈이다. 덕분에 수백만 명이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다. 

문화와 예술이 필요하다. 광통신망이 깔렸다고 저절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도 그걸로 찍어낼 텍스트가 없으면, 그걸 읽어줄 독자가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2백 년 뒤에야 나왔지만 저들에게는 그 활자로 인쇄할 성서라는 텍스트가 있었고 그 인쇄물을 읽어줄 대중이 있었다.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 영어로 번역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 시절 이미 우리에게도 금속활자가 있었고 대중을 위한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도 있었지만, 정작 그 문자로 경전을 번역하고 시를 짓고 소설을 써서 인쇄해 대중들이 접하게 된 것은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근대적 의미의 민(民)이 형성되고 대중문화가 생겨난 지 백 년이 되지 않으니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한 것은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민의 상호작용 총량이 급격히 높아지고 이 정도로 소통이 활발해진 것만도 대단하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지만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언론과 방송을 통제하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돌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터진 소통의 물꼬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소통을 위한 소프트웨어는 문화의 뿌리를 필요로 한다.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바깥으로 가지를 뻗어야 한다. 뿌리 뽑힌 근대인을 넘어서야 한다. 근대화 초기에는 뿌리가 뽑힘으로써 유동성이 높아져 상호작용이 활발해진 면이 있지만, 상호작용이 소통으로 이어지려면 다시 뿌리를 찾아야 한다. 자기정체성이 분명해야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존재들끼리 소통할 수는 없는 노릇. 세상과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물망 속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곧 자기정체성을 깨닫게 되면 세상과 통할 수 있다. 

뿌리 내리기와 상호작용 높이기. 이는 삶과 교육 문제를 푸는 키워드다. 뿌리와 날개는 얼핏 서로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진실은 역설 속에 있다. 날개는 중력의 힘을 빌어 날아오른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허우적거리거나 버둥거릴 뿐 날아오를 수 없다. 전통이라는 중력을 받아들이고 뿌리를 깊이 뻗을수록 가지를 무성하게 뻗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온다. 문명전환의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근대화의 마지막 한 고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이다. 공동체의 앞날을 염려하며 수백만 명이 광장에 모일 만큼 상호작용이 활발하고 에너지가 많은 사회이니 이 고비를 거뜬히 넘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