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가벼운 몸살 기운으로 시작된 것이 벌써 다섯째 주 동안 계속되고 있다.
들살이 이후 지난 한 달이 도무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냥 기침과 콧물 같은
단순한 감기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벌써 그 이전부터 어떤 냄새도 맡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코가 막혀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들살이 때 밤에 피우던 나무 타는 냄새도 맡지 못했었고,
터전에서 막힌 화장실을 뚫으면서도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진동하던 냄새도,
생선을 구울 때 나던 비린내도,
쿠쿠가 밥이 다 되었다고 알려줄 때면, 허기를 재촉하던 구수한 밥 냄새도 나지 않는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면 멀리서부터 나던 남편의 담배 냄새도 사라졌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세하게라도 맡을 수 있을 거야, 하고
마늘 단지에 코를 박고 맡아도,
된장 항아리를 킁킁거려 보아도 아무런 냄새가 없다.
마치 갑자기 컬러로 돌아가던 필름이 흑백 무성영화로 천천히 돌아가는 기분이다.
하느님이 내 후각을 이제 도로 가져가신 것 같다.
앞으로 하나씩하나씩 그렇게 내게 주셨던 것을 가져가시겠지.
그러다 맨 마지막에는 코로 드나들던 숨을 거두어가시리라.
갱년기에 들어 더는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도
별 우울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감각기관 중의 하나가 그 기능을 다했다 생각하니
왜 이리 마음이 비장해지고 다소 우울해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탓도 있고
비가 오는 날씨 탓도 있고
몸이 편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어떤 이유가 있든, 가볍고 기쁘고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래.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아쉬워하거나 눈물짓지 않고, 의연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먹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새기고 그래 왔지 않은가.
그러므로 지금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거다.
네, 주님.
제 후각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처음부터 안 주셨어도 되는 것들이었는데
자비로운 당신께서 은총으로 제게 주셔서,
여태까지 제 것인 양 잘 사용해 왔습니다.
이제 돌려달라 하시니, 기꺼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제 삶에서 가장 비중이 적고
불편이 적은 것을 먼저 가져가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이번엔 후각이지만
다음엔 또 무엇일지 저는 모릅니다.
제가 함부로 사용한 것부터 거두어가실지,
아니면 애지중지하는 것을 거두어가실지,
오로지 당신만 아시겠지요.
주님, 무엇이 되었든 제가 그것을 당신께 돌려드리면서
결코 아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잃는 것이 아니라,
제게서 거두셔서 또 어딘가,
영원히 현존하시는 당신께서 더 좋은 곳에 두루 사용하실 거라 생각하렵니다.
하오나 주님,
이렇게 작은 것 하나를 돌려드리면서도
이리 가슴이 내려앉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승에서 들이쉰 숨을 저승에서 내쉴 때까지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 앞에서
이러한 것들은 아주 미미한 상실이요, 소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가 잊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당신은 제 주인,
당신이 제게 무엇을 주시거나 가져가시거나
그저 당신을 찬미하고 감사하렵니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도록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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