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살이

본의 아니게 전도를 했다

종이-배 2015. 12. 26. 08:25

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해마다 성탄절 전날에는 아이들 낮잠시간에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해인가는 나들이로 청지기 교회를 다녀온 적도 있고,

또 다른 해는 성당에 다녀온 적도 있지만

오늘은 나들이를 교회나 성당으로 가지는 않았다.

단지 '성탄절=산타할아버지 오신 날'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날만큼은 마음에 꺼리지 않고 예수님의 생애를 옛이야기처럼 들려준다.

교회나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아이들은

주일학교나 집에서 얻어들은 것이 많아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기들이 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작년에 혜민이 같은 아이는 나한테 적극적으로 전도까지 하지 않았던가!^^

낮잠시간이 길지 않아서 주로 성탄에 관련된 이야기만 했지만

오늘은 어찌 하다 보니 예수님의 탄생 이전, 예언자들 이야기부터 시작이 됐다.

유난히 '리액션'이 좋은 우리 알찬이들,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추임새가 많다.

하느님이 세상을 도와주려고 사람들을 보냈다고 말하니, "하느님 착하다!"라고 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니, "나쁘다!"라고 하고

배가 잔뜩 부른 마리아가 방을 찾지 못해 추운 데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불쌍하다"고 측은해하고,

예수님이 기적도 많이 행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왔는데

예수님을 싫어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니, "아니, 그 사람들이 죽어야지!" 하면서 격분하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흘만에 살렸다고 하니, "야~! 다행이다"라며 안심한다.

중간에 여주처럼 "그럼 예수님이 마리아랑 결혼한 거야?"라며 뭔가 헷갈려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동안 신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하늘세상 땅세상,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 승천 이런 이야기들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20분 안에 구약부터 신약까지 내달려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기침이 터져서 한참 힘들어하니,

착한 알찬이들 "괜찮아? 종이배 저러다 토하는 거 아니야? 내일 계속 하면 어때?"하면서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 이야기는 성탄절 전날이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거지,

다른 날에 했다가는 '종교성'으로 인해 괜한 오해를 사기에 딱 좋아서

물을 마셔가면서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다했다.

마지막으로 그 예수님이 지금은 승천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데,

그 예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거라고 말을 마쳤다.

그렇게 말을 마쳤더니, 여러 아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너도나도 큰소리로

"나 예수님 믿을 거야. 나도 교회 다닐 거야."라고 한다.

그저 옛이야기처럼 해준 것뿐이었는데

아이들은 단 20분만에, 딱 한 번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사람을 도와주러 온 분이니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거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기쁨도, 감동도 아니고 '당황스러움'이었다.

 

내가 왜 그렇게 당황스러웠을까.

아마도 내가 아이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믿어라,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전도'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급히 "얘들아, 꼭 교회나 성당을 다녀야 하는 건 아니야.

예수님처럼 그렇게 착하게 살면 돼."라고 수습(?)을 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을 기쁨이 아닌 당황스러움으로 받아들인 나 자신을 보면서

'선교사'를 꿈꾸는 사람이 맞나,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초기교회 공동체의 집회 장면이 연상되었다.

사도 베드로나 바오로가 군중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그 자리에서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이 몇 천 명이 되었다, 라고 하는

성서 구절을 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사도들이 얼마나 달변이었기에?'라는 의심이 떨쳐지지 않았는데,

사도들이 달변이어서라기보다도

사도들이 직접 겪고 믿는 바를 힘있게 선포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군중들이 지금처럼 복잡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처럼 단순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 날 아침에는 아이들과 '빛의 예식'을 했다.

며칠 전, 아침 모둠 때 아이들에게

"성탄절은 예수님 생일인데 너희가 왜 선물을 받아?" 하고 물었더니

연주가 "예수님이 우리한테 기념품을 돌리는 게 아닐까?"하고 대답을 해서 빵 터졌던 생각이 난다.

아이들에게 성탄절이 '선물을 주는 산타할아버지가 오는 날'이 아니라

일 년 동안 서로 천사가 되어 준 친구에게 고마워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날이고

뭔가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날로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는데,

아이들의 마음에 어떻게 기억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그 시간이 참 아름답고 환하고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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