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살이/궁시렁궁시렁
나는 나무 안에서 산다
종이-배
2020. 7. 19. 11:34
나는 나무집에 산다.
나무로 틀을 짜고 얼개를 엮은 목조주택,
나무처럼 높은 꼭대기 다락방에서 산다.
내 방에는 나무로 깎은 십자가에 나무로 깎은 예수님이 계신다.
어느 사제가 성지순례길에 모셔온 성모자상은 올리브나무.
기도하거나 글을 쓸 때는 내가 직접 못 박아 만든 책상에서 하고,
잠을 잘 때는 시원한 대나무를 끌어안고 잔다.
필요한 물건들은 나무로 만든, 남들이 버린 옛 머릿장 안에 들어 있다.
빛은 얼기설기 엮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고,
그 빛은 요즘 보기 드문 성냥으로 들여온다.
식은 차를 덥혀주는 것도,
작은 음악소리를 크게 들려주는 것도 나무의 힘을 빌린다.
내 방에서는 시간도 나무 속에서 흐른다.
일 년 사계절,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도 나무와 함께 지나간다.
소나무가 아플 때 스스로를 치유해 주는 송진처럼,
나를 잠들게 하는 약과 향기는 나무 약장에 보관중이다.
나무가 몸을 깎고 벼려 나온 책들의 향연,
그보다 더 얇고 엷게 나온 종이들,
먹물에 몸을 담글 붓들은 대나무 통 안에서 쉬고 있다.
읽고 쓰고 냄새 맡으며
나무가 주는 헛됨 없는 유산을 한껏 누린다.
그러고 보니,
내 방은 나무 줄기 안에 뚫어놓은 딱따구리 둥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