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살이/또 다시 일터에서

순간이동을 하고 오라고?

종이-배 2020. 7. 12. 17:39

낮잠 시간, 잠을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줄거리를 자주 놓치게 된다. 중간에 아이들이 자꾸 이야기를 끊고 끼어들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사또가 뭐야?" "그 아이 착해, 나빠?" "아빠는 없어?" "여자야 남자야?"처럼 이야기와 관련해서 물어볼 때도 있지만, 전혀 생뚱맞은 말로 이야기의 허리를 자를 때도 많다. 이야기 줄거리를 잊어버릴까봐 한참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종이배! 나 여기 가려워. 모기 물린 데 약 발라줘." "종이배, 나 이번 주말에 캠핑 간다!" "종이배! 그런데, 얘 베개가 나한테 넘어왔어."라고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하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렵다. 가끔은 어디까지 말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번번이 삼천포로 빠지는 아이한테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한다. "그럼 그만 듣고 잘래?" 하고 물으면, "아냐~ 계속 해줘."라고 한다.

아이들은 주로 무서운 이야기나 우스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어른들과는 코드가 많이 달라서 "으, 무서워." 하고 떠는 부분도 다르고, 빵 터지는 부분도 다르다. 지난 주간에는 '여우누이' 이야기를 해주게 됐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서운 이야기인데, 우리 반에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밤에 악몽을 꾼다는 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가 있을 때는 해주지 않는 이야기다. 그 날도 이야기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질문으로 중간중간 섰다가 간다. "누이가 뭐야? 누이가 여자야?" 하는 단순한 질문부터, "어떻게 똥구멍으로 간을 빼?" "첫째랑 둘째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왜 쫒겨나?" 하는 다소 논리적인 질문까지 아이들의 궁금증은 끝이 없다. 그러더니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한 아이가 매우 진지하게 묻는다. "그런데 종이배, 진짜 구미호가 있어?"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있다, 없다, 봤다더라, 아니라더라 온갖 추측과 지식으로 난상토론을 벌이더니, 나한테 "종이배가 순간이동을 해서 갔다 와."라고 한다.

언젠가 내가 "순간이동을 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건 아무 때나 되는건 아냐. 기도를 많이 하면 아마 들어줄 걸?"이라고 했던 말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요청하는 거다. 이야기를 할 때는 "야~ 조용히 해! 이야기 못 듣잖아."라고 불평하던 아이들도, 친구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야~ 그것도 모르냐?" 하던 아이들까지 모두 한 목소리가 됐다. 나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울 마음에 "알았어, 알았어." 하고 대충 대답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이들은 아침에 보자마자 묻는다. "순간이동하고 왔어?" '헉.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잊지 않고 있었구나.'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순간이동을 하면 뭐가 궁금하냐고 했더니, "구미호가 있냐, 식인종이 있냐, 백호와 청룡은? 옥황상제는? 하느님은? 예수님은? 산타 할아버지는?"이라며 그런 것들이 진짜 있는지 다 보고 오란다. 내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없어."라고 누누이 말해 왔건만, 아이들은 그런 답보다는 있다, 없다로 깔끔하게 정리되기를 바라나 보다.

'어떻게 하나? 있는 걸로 해야 하나, 없는 걸로 해야 하나?' 고민스러워졌다. 그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동그랗게 모여앉게 한 뒤에 말을 꺼냈다. "너희들이 나 순간이동하고 오라고 했잖아. 그래서 어젯밤에 기도하고 잤거든? 그런데 오늘 아침에 기도하는데, 하느님이 나한테 말씀하시더라." 하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본다.

"순간이동을 해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다칠까 봐 안 해주시는 거래. 구미호를 만나면 구미호한테 잡혀먹힐 수도 있고, 백호나 청룡, 식인종한테도 잡아먹히면 안되고, 하느님을 보면 너무 빛이 강해서 앞을 못 보게 될 수도 있고, 산타 할아버지는 실제로 보고 나면 성탄절에 선물을 못 받을 테니, 일부러 나를 위해서 내 눈에는 안 보여주시는 거라더라?"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비밀을 알려주시겠대. 중요한 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게 진짜라고." 나의 오래된 벗, 어린왕자의 말을 빌려서 아이들에게 답을 하고는, 스스로 답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만약 먼 훗날까지 이 말을 기억한다면, 내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는 걸 알아주겠지. 책에 나온 내용을 슬쩍 빌려온 것 정도는 용서해 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