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살이/궁시렁궁시렁

참으로 아픈 예방주사로다

종이-배 2020. 4. 4. 08:46

2020년 4월초.


엊그제 긴회의 시간에는 [차이나는 클래스](김누리 교수편)를 보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독일의 교육 체계가 한없이 부럽기도 하고,

나 역시 한국 역사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어쩌면 잘못 된 교육의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비교와 경쟁의 DNA는

내 부모의 탓도 아니고,

나의 탓도 아니고,

어쩌면 그런 사회 속에서, 그런 교육 속에서

너무도 잘 순응한 사람으로 컸기 때문일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코로나로 달라진 요즘 세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코로나19.

인류가 다 멈춰섰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닫아걸었다.

가능한 한 서로 만나려 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어디론가 미친듯이 달려가던 인류를 그 자리에 멈추게 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

이것을 그동안에는 보이지 않게 퍼져가는 악의 화신처럼,

죄를 짓게 하는 하수인처럼만 생각하곤 했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 가족만 아니면 돼. 우리나라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적인 욕심에

마스크를 쟁이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국경을 닫아걸고,

무균실에 들어가 있듯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된다고.

마치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잡아죽이면 다 될 것처럼 했듯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원흉으로 몰아세우면

대구경북만 폐쇄하면 이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을 듯이 말하는 무리도 있었다.


세월호로 꽃같은 아이들이 죽었을 때,

그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무척이나 아프게 겪으면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라는 것,

그저 살아 있기만 해도 고마운 게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었다.

당시에는, 당사자에게는

가슴을 찢고 애간장이 다 녹은 엄청난 고통이었으나

그들의 무죄한 희생으로, 고마운 견딤과 버팀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보다 앞세웠던 헛된 것들을 아쉬움 없이 손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던가.


어쩌면 코로나19는 세월호만큼이나 아픈,

지독히 아프고 피하고 싶은 예방주사 같은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밖에는 파멸로 가는 인류를 멈춰세울 방법이 없었던,

이렇게밖에는 자본과 돈을 숭상하는 인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져줄 수 없었던,

사람의 패악질로 죽기 직전에 이른 지구에 잠깐 숨통이라도 틔우기 위해

미치광이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하는 이 사람들을 잠깐 멈춰세우려는,

어쩌면 극단의 처방 같은...

형에게 동생들 잘 돌보라고 맡겼더니

철들지 않은 형이 동생들을 하도 괴롭히고 수탈하여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보고는,

형을 동생에게서 잠시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내 배로 낳고 내 손으로 기른 자식이지만 사랑의 매를 들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으로,

못된 자식이어도 가슴에는 피가 철철 흐르지만

철을 들게 하기 위해서는, 그 형도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형제가 오손도손 사랑하면서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세우고 사는 방법을 다시 가르칠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함께 고통을 겪어야 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느님도 그렇게 이 시간을 견디고 계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


그래서 자연은 코로나19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봄을 맞는 나무는 꽃을 피우고,

새들은 알을 품어 아가새들을 키워내고,

야생을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느릿느릿 걸어다닌다.

어제처럼, 작년처럼, 백년 전처럼, 천년 전처럼.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허튼 일은 없고,

하느님이 주시는 것에 나쁜 것은 없다는 믿음을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부르는 사랑의 부활찬가까지도 포기하시며

당신도 쓸쓸하고 외로운 부활절을 보내시겠다고 하시며

이렇게까지 아픈 주사를 놓으시는 데는

분명히 어떤 뜻이 있으실게다,라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