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 중에서
2018년 2월 7일
엄기호, [공부 공부-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읽었다.
터전에 있던 책을 주말에 빌려서 읽겠다고 가져와서는, 읽다 보니 달착지근하게 쏙쏙 들어오는 내용이 많아서 결국 다시 줄을 그으며 보게 되고, 터전에는 새 책을 사다 놓았다.
문장이 단순하고 깔끔해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배움'이 뭔지, '공부'가 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올해 고3이 되는 아들내미에게 진짜 공부가 뭔지, 인생에서 배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주고 싶지만, 이 아이는 이런 책에는 관심조차 없을 테고 아마 이해하지도 못할 거다. 나도 그 나이에는 그랬을 것이므로. 이제 인생을 돌아돌아 이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움의 기쁨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알아가고 있는 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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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열매는 기쁨이다.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이며, 보태는 기쁨이며, 견디고 성장하는 기쁨이다.(5)
이렇게 서로 기쁘게 하려고 마음을 쓰는 것, 그걸 에로스라고 부를 것이다. 사람의 삶에서 에로스가 넘쳐나는 것만큼 기쁜 것이 어디 있겠는가.(5)
선생님은 나에게 공부하는 이가 오만하고 교만해지면 그건 바로 망하는 길이라고 경고하셨다.(6)
지금 내가 여전히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돌보기 위해서다.(10)
외롭지 않게 늙을 수 있을까? 폭력적이지 않게 늙을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남을 괴롭히지 않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늙을 수 있을까?(11)
공부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틈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다. 보이는 것은 많은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은 없다. 이러니 늘 당황해하고, 당황한 만큼 속상해서 화를 낸다. 자기의 무능과 무기력을 계속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쌓았는데 무능력만 확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다시 능력을 쌓고자 '공부'로 후퇴하는데, 그것은 '다룰 줄 알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서 이 악순환은 반복된다.(13)
우리는 공부를 통해 온 천하에 관한 언어는 얻었다. ... 그래서 교실에서 술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앉아서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앉아서는 천 리를 보고 서서는 만 리를 내다본다. 그러나 정작 길을 걸으면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삶을 다루는 데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14)
자기 자신과 화해하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누군지 모르는데 화해할 수는 없다. 또한,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디에서 자신과 분열되어 있는지 봐야 한다.(15)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냐 세상과의 화해냐 중에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공공선(公共善)이 되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18)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이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함을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더불어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20)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이다.(21)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공부라면, 더불어 공부하는 관계, 즉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우선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기쁨이다.(22)
그러므로 공부란 공부를 하며 기쁨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23)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함'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으'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43)
가르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몸을 억압하는 기술이 아니라 몸의 언어를 읽는 기술이다. 배우는 사람이 몸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읽고, 그 표현을 통해 배움의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45)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꿈'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 사람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 이 때문에 꿈은 청소년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열패감, 즉 열등감과 패배감의 근거가 되어버렸다.(79)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93)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116)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습관과 몸을 가진 사람이 배움을 지속할 수 있다.(118)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의 중요한 두 측면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숨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숨의 길이다.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 두 번째로는 물속에서 자기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137)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서, 자신에 관한 모름에서 앎으로 이동한 데 초점이 맞춰진다.(139)
내 한계인 '1분의 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된다.(140)
탁월함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다루는 기예'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141)
배움이 일어나는 것을 포착하고 잘 유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움이 실패했을 때 잘 대처하는 것이 전문가다. 그 실패를 포착해 해석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전문가다. 전문가는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돌발적인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수업을 잘하는 기예만큼이나 이 기예의 한계를 잘 아는 것이 전문가의 자기 이해라고 할 수 있다.(145)
가장 위험한 것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전문가인 척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한다.(147)
자기가 처한 한계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정확하게 판별하고 판단하는 게 전문가다.(147)
재능의 차이를 남과 비교하면 비극이 되지만 자기에 집중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의 원천이다.(154)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과 자기 욕망을 동일시한다. ...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는 힘'이다.(161)
재능은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다. ...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게 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요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된다.(162)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과 '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면서 '자기/나'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164)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166)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나'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를 안다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68)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169)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존재 이상의 소중함을 가지고 있다. ...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순간,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이들 모두를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170)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171)
학생을 이름으로 기억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이다.(173)
전문가는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집단으로 존재한다. ... 한 전문가가 전문가로서 어떤 수준의 기량을 가졌는지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문가인 자신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는 홀로 연구하되 함께 평가하고 판단한다.(175)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178)
세계 전체와 불화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이 낫다.(182)
배움의 능력...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183)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184)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185)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185)
화두는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의미한다. 내가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나 자신과 저 세상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 공부는 곧 태도다. 배움의 태도란 결국 자기 자신과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앎이다.(186)
가르치는 일은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답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187)
오히려 가장 나쁜 배움의 태도가 자기 배움의 방식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배우는 것이며,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다.(188)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내 마음은 나와 분리되어 타자가 된다. 바로 이때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존재, 즉 타자로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면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마음대로 안 될 때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는 연인, 제자 그리고 자식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의 최종 카드인 '버림'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이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192)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193)
사람은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 성장이란 생명체가 살아가는 한,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그 무엇이다... 생명체가 배움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가는 과정을 '성장'이라고 부르며, 그 성장 과정이 곧 삶이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어내는 힘이 커지는 것, 즉 성장이 배움의 기쁨이다.(198)
중요한 것은 삶의 연속성, 즉 서사성에 관한 감각을 가지는 일이다. 이런 감각이 있어야 자기 삶을 서사적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할 수 있다. 지난 경험을 성찰하며 교훈을 이끌어내고, 앞으로 올 것 같은 사건을 예측하며 대비한다.(200)
흥미가 이어질 때 사람은 견디는 힘, 즉 지구력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견디는 힘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수 있다.(203)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 배움의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과정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205)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기량과 그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206)
좋은 배움의 공간이란 무지한 사람이 배움의 용기를 낼 수 있는 곳이다. ... 학교와 같은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207)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라고 할 때, 우리가 내어줘야 하는 자리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역할을 주는 '일'자리이며,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뻗을' 자리이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누울' 자리다.(208)
배움의 외부적 요인으로 흥미를 끌어내려는 시도를 "쾌락의 뇌물로 주의를 끌고 노력을 짜내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11)
성과 위주의 사회에서 공부를 지속시키는 것은 '흥미'가 아니라 '성과'다. 성과가 성장을 대체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면 마치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212)
공부를 하면서 무질서에서 질서를 파악하고 분별하는 지적 쾌감을 느끼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그저 결과를 향해 질주하게 된다.(213)
서사성이 사라지만 삶은 시간적으로 파편화된다. 파편화된 삶은 조각난 에피소드들을 아무렇게나 연결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삶이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예능 프로그램처럼 되는 것이다. ... 사는 건 기쁘지는 않고 재밌기만 한 것이 된다. ...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ㅂ'라는 욕만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 같은 말만 해야 한다.(215)
재미에서 기쁨으로의 전환- 나의 기량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이 성장이라면, 성장이 있는 삶은 기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는 이렇게, 성장을 통해 기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재미가 아니라 기쁨이다.(217)
무엇인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219)
사람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221)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 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는 이것을 '도(道)'라 불렀다.(230)
리처드 세넷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230)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익히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때, 내 몸에 익혀지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약함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244)
자기에게 집중할 때 사람은 익힘의 지루한 과정에서도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역량이 증강하기 때문이다. .. 이 배움의 기술 역시 머리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듀이는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했다.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245)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배운 자가 아니라 배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지금처럼 한 사람이 자기 생애에서 적어도 두세 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삶을 전환해야 하는 시대에는 배운 자가 아니라 배우는 자, 아니 배울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배울 줄 아는 자가 배움의 기쁨을 지속할 수 있다.(246)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249)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의 힘이다.(255)
공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256)
내 눈에는 그저 많은 별, 압도적으로 경이로운 별이었지만, 그에게는 그 하나하나에 다 제자리가 있었다.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257)
아름다움이란 분별하는 힘을 통해 각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고 그 이름들이 움직이는 질서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258)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질문을 통해서 배운다고 할 수 있다.(262)
기 드보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 것으로 전락한다.(270)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275)
지식의 쓸모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 세상의 아름다움, 우주와 역사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있다.(276)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훌륭한 삶이란 자유를 활용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공ㅂ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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