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 산다는 것> 중에서
2017년 3월 19일
박기호 신부님이 쓰신 <제자로 산다는 것>을 다 읽었다.
처음에는 아껴서 읽다가, 한동안 다른 책을 읽느라 책꽂이에 꽂혀 있다가,
어젯밤에 반쯤 남은 부분을 한꺼번에 다 읽었다.
예전에 편집자 생활을 할 때 생각해 보면
책을 내고 싶어하는 신부님들이 강론집을 내고 싶다고 원고를 보내 온 적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어지간히 좋은 내용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먼저 들고 온 원고를 받아 책으로 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강론이라는 것이 말로 들을 때와 글로 읽을 때가 달라서
그것을 쓰신 신부님들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귀한 묵상글이겠으나
책으로 엮어졌을 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감화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강론집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인지
책을 살 때도 강론집을 일부러 사서 읽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서점에서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이 책을 굳이 구해서 읽은 까닭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 위에서 마을을 일구고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그분의 삶이 존경스러워서였고,
언젠가 매일미사 묵상에서 잠깐 맛보았듯이
삶이 훌륭한 사제는 말씀도 훌륭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이 기대가 크게 빗나가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전문가가 아닌 누군가의 재능 기부 정도로 만들어진 것처럼 세련되지 않은 편집 디자인이야 별 상관이 없지만
오탈자와 틀린 맞춤법 때문에 읽기에 살짝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까지도 소박한 저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복음과 관련된 강론 아랫 부분에 간단히 덧붙인 내용들도 마치 식사 뒤에 먹는 사과 한쪽처럼 상큼하다.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았지만 밑줄 그은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복음 구절에 따라가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도 좋겠다.
------------
한없는 사랑과 긍휼함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마르지 않은 사랑의 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면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몸을 가지고 있을 뿐 하느님의 사랑이 내 몸을 빌어서 나오는 것뿐입니다.
사랑이란 하느님께서 내 몸에 육화되신 생명입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나 손이 보이거든 그것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아버지의 자비이며 부르심의 음성입니다.
그것을 알아듣는 능력이 영성입니다.(14-15)
마음을 내서 일하게 될 때에는 노동의 즐거움도 느끼고 흙 위의 노동이 주는 치유의 기운도 느끼게 됩니다...
생활 중에 가장 소중한 일은 '허드렛일'입니다.(21)
자발적인 잔손 일들이 노동의 기초입니다. 그것이 마을생활을 청결 단아하고 정갈하게 꾸려주는 삶의 미학이 되고 노동의 생산성을 부여합니다...
눈길이 가야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야 손길이 갑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에 눈길이 가야 손이 갈 수 있고 몸을 쓰는 데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22)
더딘 것도 나쁘지 않다.(23)
둘이나 셋이서 논의하고 궁리하면 예수님이 함께 곁에 계시니까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32)
함께 노동하는 협력의 태도는 기도생활과 관련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도 예수님과 동업하십시오. 그러면 여럿이 함께 일할수록 기쁨은 크고 결과는 좋을 것입니다.(33)
창조성이란 자기다움입니다. 사순절은 경제(빵)로만이 아니라 영성(말씀)으로 자아를 정화시켜 모든 피조물이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수행의 계절입니다.(35)
참사람이 되려면 종종 광야로 나가 삶을 담금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고 버텨야 환골탈태됩니다.
길이 아니라면 되돌아와야 해답인 것.(36)
창조주께서 주신 질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대가족 제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끝없이 돌아다니는 소비주의 유동문화에서 정주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부는 적게 하고 노동을 많이 해서 평생의 기술을 갖는 삶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돈으로 무엇을 사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 버리는 비움에서 답을 찾읍시다.(43)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대로 현실화된다는 사실 하나만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46)
세월호는 비정한 우리 시대의 성사(聖事)입니다.(55)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하느님은 농부이시고 우리 마을 가족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농조합원들입니다.(57)
공동생활을 건강하게 든든하게 기쁘게 하는 비결은 공동체 영성에 철저히 결합되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59)
영의 벗은 그가 나의 벗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63)
우리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솔직하고 중요한 문제는 이 모질고 비정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도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 바늘이란 '천국의 좁은 문'이란 뜻이 아니고 바늘도 들어갈 수 없이 단단하게 굳어진 관념, 자기 지식,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신념이며 소유욕으로 인해 부자유한 정신 세계를 의미합니다.(65)
주님께서 버리라면 버리고 따르라면 따르고 가라면 가고 십자가를 지라면 지고 가는 비움의 삶에 구원이 있습니다.(66)
주류가 중앙정치를 잡고 법과 제도를 결정하면 변방의 비주류들은 그 결정에 따르는 의무를 부여받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결정한 것은 갈릴래아 사람들도 지켜야 하고 삼청동과 여의도에서 결정하면 제주도 귤밭 농부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공평하십니다. 권력은 중앙의 주류가 잡은 대신 영성은 변방의 비주류 삶에 담아두십니다.
예언자가 주류에서 나올 수 없고 비주류가 권력을 가질 일도 없습니다.(69)
반면에 많은 민족과 종족들이 섬겨온 신들이 무수한데 그 신들의 특징은 절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서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물과 물이 싸우지 않고 산과 산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산에 대한 이름과 오르는 길이 다를 뿐이지요.(73)
사물은 자신의 역사와 삶의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 언어를 마음과 귀로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영성(靈性 Spiritual)이라 합니다. 그것을 은총의 제의로 표현하는 것을 '성사(聖事)'라고 합니다.(76)
영성이란 사물 안에 있고 이면에 있는 언어를 듣고 보는 귀와 눈입니다. 신앙인은 영성으로 사는 사람입니다.(77)
음식은 먹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모시는 것입니다.(79)
"오늘 우리의 일본 교회에는 '청소년이 보이지 않고, 노령화되고, 미사 참례자가 적고, 신자수가 줄어들고...' 등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말하는데, 진짜 문제는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고 잇느냐에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인식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82)
하느님 나라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거북이처럼 목표를 향해 가면 되는 것이지 토끼처럼 승리를 목표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 행복의 길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습니다. 부자가 되는 길도 돈을 많이 버는 법과 돈이 필요 없이 사는 길과 가진 것에 만족하는 길이 있습니다.(86)
무엇을 통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 자체를 청하는 것, 과정을 통하지 않고 목적 자체를 구하는 것이 가장 빠른 행복의 길입니다.(87)
자신의 생각 마음 태도 행위가 공동생활에서 잘못 될 수 있고 갈등을 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잘못된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하지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자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97)
하늘은 본래 푸르건만 사람들은 구름을 하늘이라고도 말한다.(98)
사람에 의해 변질되지 않은 진정한 사랑이란 마음을 받는 것(사랑 愛는 마음(心)+받다(受)의 합성어. 마음을 담아 받는 것, 정이 교류되는 상태가 사랑이다)입니다.(154)
사순절입니다. 내가 관계하고 사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성찰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과의 진실성을 회복하십시오.(159)
기억은 시간을 넘고 정(情)은 공간을 넘는다.(180)
"부자가 되는 길은 두 길이 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아니면 돈이 필요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톨스토이)
돈에는 예민한 센서가 달려 있어서 아무 데나 가지 않고 돈 냄새가 질퍽한 곳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미 경험적으로 사업이나 돈을 모으는 센서가 좀 둔하다 싶으면 빨리 길을 바꾸어서 돈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구하는 생활로 가야 합니다. 필요한 양식을 직접 생산하는 삶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거기에 건강과 행복, 인정과 평화가 있습니다.(206)
날마다 서원이 종신서원이다.(206)
'사람이 천 번을 노력해도 하늘이 한번 흔들어버리면 어쩔 수 없다' ... 내 생각과 의지보다 하느님의 섭리가 크니 작은 것이 큰 것에 순종함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력한 것의 결실에 감사하고 쭉정이에 순응하는 것을 배우고 나니 안달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성패에 무관하게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을 함께 한 행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좋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폭력과 무지하고 난폭한 공권력에 분노하면서도 분노의 이면에서 저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불쌍히 여겨 연민의 정으로 대속의 기도를 바칩니다. 지금 참담하지만 승리를 내다보니 지금 만족하지 못하고 가짐 없어도 자유롭습니다. 달관의 노년이 되기만을 소망합니다.(210)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도 강을 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양이 목자를 따라야지 목자가 양을 따라가면 목자는 길을 잃고 죽음의 골짜기에 이를 것입니다.(213)
마음의 평화란 속상하는 일 없고 돈 갚을 일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 상태가 마음이 평화로운 순간입니다.(215)
특별히 자신의 운명이 너무 기구하다고 생각될 때는 한 편의 드라마에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 중임을 생각하십시오.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작가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결론을 맺으실 것인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이 어떠한가.(221)
나의 종국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추구하는 것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없어질 것을 얻고자 안달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숭고한 가치를 보게 합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224)
지금 내 삶은 내가 원하던 바 아니었는데, 왜 번뇌와 고통은 내가 당해야 할까?
내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는데 그는 왜 나를 분노케 하여 괴롭히는가.(233)
다수결식 결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다수결식은 간편하고 쉽지만 공동체에서는 좋은 방식은 아닙니다. 다수결이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236)
첫째는 사람과 사람의 짓을 구분하는 이성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사람이라는 것. 그의 짓거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짓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단 한번만 새겨도 접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239)
아름다운 것은 누구나 사랑합니다. 모든 존재는 신의 창조성과 사랑을 담고 있어서 본래가 아름다움입니다. 홀로 피어 있는 꽃을 보고 미워할 자 없기에, 내가 만나고 미워하기 전까지 그 역시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다만 내 지배에 들어오지 않는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240)
공동생활의 비결은 배려심에 있다. 자신을 타인에게 맞추려는 것이 배려심이고, 타인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것은 지배심이다. 지배욕은 공동생활에 아주 쓸모없는 병이다.(241)
거북이처럼 목표를 확실히 하고 가라.
토끼는 거북이를 보고 달렸지만 거북이는 목표를 보고 기어갔다.
토끼에게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고 거북이에게는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토끼의 하루는 욕망과 권태와 무상함뿐이었지만 거북이는 한걸음 한걸음이 의미로 가득했다.
토끼: 왜 나를 깨우지 않았니?
거북: 평온하게 쉬는데 왜 깨워? 나만큼이나 행복하던 걸.(251)
못 매운 이들은 몸으로 노동하고, 많이 배운 이들은 키보드로 노동한다. 어차피 막노동이다.(255)
나를 아는 것도, 타인을 아는 것도,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먼저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알콜중독을 치료하는 핵심 내용은 감정을 바라보고 다스리는 훈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감정에 대해 손쉽게 벗어나거나 숨으려는 것에서 습관적인 중독증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 자기 관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관조(觀照)라고 합니다. 자기는 보지 않고 상대만 보려고 하거나, 자기만 보고 대상은 보지 않으려는 습관적이고 고질적인 대면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지요. 회개입니다.(262)
집은 좁아도 함께 살 수 있지만, 속이 좁은 사람하고는 함께 살기가 어렵다.(274)
비가 연일 내리더니 습도가 높아 양치용 죽염이 축축해졌다. 소금은 물에서 왔으니 물을 찾아가려 애쓰는데,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나왔어도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296)
할 만큼 했다고 여기는 일에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하는 사람 마음에 달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여기는 일에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는 참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