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백 번 하면 된다
2016년 3월 5일 토요일
정말 오랜만에 갖게 되는 '평범한, 쉴 수 있는' 주말이다.
몇 가지 주말 동안에 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급한 일 없이 쉴 수 있을 때는 다 놓고 좀 쉬자는 마음으로 토요일을 맞았다.
마침 녹차도 일이 밀렸다며 출근을 하고, 규진이는 도서관에 갔다가 학원에 간다고 나가니,
집에 있는 사람은 현진이와 나뿐.
현진이는 토요일이라 컴퓨터로 자기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날이다.
딸린 식구를 건사하지 않아도 되는, 이렇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그래, 오늘이 마침 '주님을 위한 24시간'으로 정해진 날이니까
전민동 성당까지 걸어가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메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긴 우산을 지팡이 삼아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부터 길찾기로 찾아보니 왕복으로 8킬로미터 정도가 못 미치게 나온다.
8킬로면 두 시간이면 되겠다!
'주님을 위한 2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산티아고를 위한 체력 단련이라고 해야 하나.
로사리오를 돌리면서 가다 보니 어느새 15단 정도는 후딱 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가는 게, 어찌나 한가롭고 좋은지!
한참 동안 서서 새소리를 듣기도 하고,
쇠딱따구리 나무 타고 올라가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어느새 지천으로 피어 있는 큰개불알풀 꽃, 쇠별꽃 구경도 하고,
뺨으로 스치는 따뜻한 봄바람을 느껴보기도 하고,
벌써 터질 준비 마친 목련꽃 송이를 만져보기도 하면서
피정처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성당에 가서 조배를 한 뒤 펴 본 성서말씀은 고린토 전서 3장 7절의 말씀이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부모는 심는 이, 교사는 물을 주는 이일 뿐.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한 거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며 받아들인다.
두 시간을 다녀왔어도 잠시 앉아 있으니 다리도 회복되는 느낌이다.
좋아, 산티아고까지 800킬로미터면, 이렇게 해서 100번만,
오늘처럼 백 번만 하면 된다!
대전에 내려와서 처음 자리잡았던 6단지 아파트.
여기에서 보면 항상 이 잔디밭이 내려다보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서울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눈이 호강했던 곳이라 그런지
이 잔디밭만 보면 남다른 애정이 간다.
우리 동네에서 봄이 되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들꽃이다.
큰개불알풀. 이름은 좀 거시기하지만, 파란색 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 꽃과 이해관계가 없는 내 눈에도 이렇게 확 띄는 꽃이라면
이 꽃이 매파로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얼마나 눈에 잘 띌 것인가.
대단한 봄 들꽃의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면, 부지런한 농부들이었다.
주로 과수원에서 가지 치기를 하거나 거름을 주는 분들이었고,
두어 분은 벌써 나물을 캐는지 '오리궁둥이'를 다리에 건 채 밭둑을 헤매고 계셨다.
그런데 여기 텃밭 쥔장은 마음이 급한 분인가 보다.
어느새 작물들 잔뜩 심어 놓으셨다.
이것들이 꽃샘추위에 잘 버티어 내려나?
아니면 지난 겨울 잘 버티어 낸 것들인가???
맨날 차로만 건너던 곳이다. 위든, 아래든.
생각해 보니 고속도로를 '걸어서' 건넌 건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위에 있는 다리로 건너니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도 별 것 아니다.
11시 11분에 출발했는데 12시 정각에 전민동 성당 앞에 섰다.
주일마다 왔던 성당인데 걸어와서 만나니 참 반갑다.
돌아오는 길. 갑천과 관평천 따라 걸어올까 하다가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가보기로 했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목련에서 꽃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노란잎으로 장관을 이루었던 길을 걷는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다.
가만히 보니,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떼지어 후루룩 날아다니기도 하고,
직박구리도 시끄럽게 울고, 가끔 까치도 울고, 쇠딱따구리도 다니고,
솔새처럼 아주 작은 새들도 눈에 많이 띈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있고 빨리 날아다녀서 볼 수가 없다.
내 귀가 여러 가지 새 소리를 한꺼번에 듣고 있고
그것들을 종류별로 구별해 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어느 새가 어떤 목소리인지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새로운 세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