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살이

올해 사순절에는

종이-배 2016. 2. 10. 07:40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재의 수요일이다.

아직 미사에 가지 않아 재를 받지는 않았지만 사순절이 시작되고 있다.

작년 사순절에는 <엘리야와 함께 걷는 40일>이라는 책을 벗삼아 사순절을 지냈는데,

올해는 <다 이루어졌다>(바오로딸)라는 책을 벗삼기로 했다.

사순시기에 맞춰 새로 출판된 신간이라 관심이 가는 것도 있지만,

부제로 '자비의 해에 읽는 요한복음 수난기 묵상'이라는 것이 더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성금요일이면 '요~~한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라고 음률에 맞춰 낭송되었던

그 수난기를 40일로 나눠서 조금씩 묵상한 내용이 어떤 건지도 궁금했다.

며칠 전 책을 구입해서 놓고는,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오늘을 맞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사순절과 새해를 맞아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더 큰 '말씀 선물'을 받았다.

그 말씀이 내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그냥 전 신자들에게 주신 거여도 상관없다.

어쨌든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내게 주신 거라 생각하므로....

(그런데 이와 관련된, 잊지 못할 경험 하나!!!

그날, 내가 부엌일을 하면서 왠지 마음에서 일이분 동안 그분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동안 받았는데

바로 그 시간이 그분이 내게 이메일을 쓰신 같은 시간이었던 것을 알고는, 솔직히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모른다.

그분과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따져볼 때, 어쩌면 그것은 <인터스텔라>같은 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차원이 다른 소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관계가 마음으로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순간적으로 '주파수'가 통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며칠 전, 누군가에게 메일을 쓰면서 서두를 '보고 싶은 ~에게'라고 썼다.

그런데 그렇게 써놓고 가만히 생각하니,

나는 그를 '보고 싶다'기 보다는 '듣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 말하는 내용, 말하는 목소리를 훨씬 더 그리워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서두를 '듣고 싶은 ~에게'라고 고쳐 써보니, 모양새가 얼마나 어색한지...

그러면서 다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듣는다'는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발달해 있던 것도 듣는 기능이고,

사람이 죽고 나서도 한참동안 남아 있는 기능도 듣는 기능이라고 했다.

나도 <듣기>라는 책을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읽기도 했고,

아이들에게도 '잘 들을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오기도 했다.

사람의 말뿐 아니라 온 사물이, 온 우주가 소리와 파장을 내고 있고,

그것을 듣는 폭이 넓어질수록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아듣고 따를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아무튼 그렇게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던 터에,

내가 받은 선물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과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라는 말씀이었다.

그분이 내게 주신 말씀은 성서 안에서 성모님이 카나 혼인잔치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던 것,

성모님이 무슨 특별한 일을 하셨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셨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 역시 엄청난 묵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설 연휴 내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베드로와 요한, 바오로 사도와 성모님까지

내게 익숙한 성서의 인물들에게 계속 대입해 보기도 했다.

아직은 기막힌 깨달음이 가슴을 치고 들어오지는 않고 여러 가지 피상적인 생각만이 맴돌고 있지만,

아마도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마음에 담고 사순절을 지내다 보면, 뭔가 '들리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성모님도 당신의 자리를 지키고 계셨기에, 사람들의 어려움을 들으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고...

 

내 자리가 어딘지 알고 그 자리를 지키면

어쩌면, 내게도 자연스레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디에 자리하기를 원하시는지,

둘레의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간청해야 하는지...

그리고 아마 그것을 마음으로 듣게 된다면,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갈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