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그 아기는 누구였을까?
<그날 밤 그 아기는 누구였을까?-성탄 자리를 찾았던 어린 목동 이야기/생활성서2011.12>
어릴 적에 경험했던 오래 된 일들은 그것이 내가 진짜 겪은 일인지, 혹은 꿈을 꾼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지금 이야기하려 하는 ‘그 날’ 일도 그렇다. 꿈이었다고 하기에는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고,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비스러워서 마음속에만 내내 간직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그 날 일을 기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알듯 모를 듯한 아빠의 얼굴이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이상한 표정. 아빠는 분명히 감격에 차서 기뻐하고 계셨지만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아빠의 수염 아래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다. 당시에 내가 살던 마을은 아주 조용하고 작은 곳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 잘 알며 가족처럼 지냈다. 나는 심심하면 마을 어귀로 나가 놀곤 했다. 동네 어른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고, 많이 컸다며 축복을 해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낯선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지나쳐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 어귀에서 놀다가 낯선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오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나라에서 무슨 호적 등록인가를 하라고 했다고, 그래서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다들 자기 고향을 찾아가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빠도 이렇게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양들을 더 잘 돌보아야 한다면서, 밤에도 양떼를 돌보러 들에 나가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는 저녁을 먹고 난 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들을 보러 나갈 채비를 하셨다. 준비를 한다고 해봐야 양들을 모는 지팡이 하나와,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뿔피리 하나를 챙기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허리띠를 매는 아빠를 보며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도 함께 가겠다고 졸랐다. 아빠는 나를 보시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래, 너도 이제 많이 컸으니 데리고 가마.” 하셨다. 그리고 밖이 위험하니 아빠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공기는 차갑고 손도 시렸다. 들판에 나가니 이미 다른 몇 명의 목자 아저씨들이 나와 계셨다. 아빠는 불가에 모여 아저씨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아빠가 이야기하는 동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새끼양을 품에 안고 쓰다듬어 보았다. 새끼양은 잠시 꼬물대더니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잠든 새끼양을 들여다보며 있는데 아빠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를 부르셨다.
“얘야, 오늘 밤은 특별한 밤이 될 것 같구나.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지 않고 먼 길을 떠나야겠다.”
“왜요? 어디로 가요?”
“글쎄다. 우리들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으니 하느님이 알려주시겠지.”
아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우리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하셨다. 오늘 밤에는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그 기운을 모른 척 지나치면 안 될 것 같다고,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을 느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특히 그게 옳다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주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멀뚱멀뚱 아빠만 바라보았다. 아빠는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천사가 다녀가셨어.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면 천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어서 빨리 길을 떠나자. 너는 아빠를 잘 따라와야 한다.”
아빠는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하셨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무서움으로 온몸에 소름이 오싹했지만, 나는 아빠가 천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무서움을 꾹 참고 입을 앙 다물었다. 아빠를 놓치면 안 된다는 당부가 떠올랐다. 걸음을 서둘러 아빠 옆으로 가자 아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아브라함이라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 이 할아버지는 어느 마을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먼 길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지. 익숙한 곳을 버리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하느님을 믿고 용기를 내서 길을 떠났단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에 도착하게 되었단다.”
아빠가 가끔 들려주신 적이 있었던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아빠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그 이야기를 하고는 이내 다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빠도 어쩌면 지금 나처럼 속으로는 이렇게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나. 다리가 아파왔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밤하늘의 별은 더욱 반짝였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언제까지 가야 해요? 길을 잃은 건 아닌가요?”
아빠는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라. 저기 가장 반짝이는 큰 별이 있지? 우리는 지금 별이 가리키는 대로 가고 있어. 저 별이 우리에게 길이 되어 줄 거란다.”
밝은 낮에는 해가 있듯이, 밤하늘에는 언제나 별들이 있었다. 아빠는 별들의 움직임을 보며 방향을 알고, 계절을 느끼고, 다음 날 날씨를 점쳐 왔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 별이 뜨고 지는 것은 길을 가는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나침반이었다.
아빠와 아저씨들이 다시 모인 곳은 어느 허름한 마구간 앞이었다. 마구간에 누가 있는지 안에서 약하게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불빛 너머로 알 수 없는 거룩한 기운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아빠와 아저씨들은 데리고 온 양떼를 밖에 두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내게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혹시 새끼양을 낳았나?’ 하는 호기심에 아빠의 옷자락 뒤에 숨어 살그머니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마구간 안에는 소와 말과 양들이 있었고 구유 곁에 낯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빠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구유를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구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얼떨결에 아빠를 따라서 머리를 조아린 나는 얼른 아빠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평생 잊지 못할 아빠의 그 눈물을 본 것은! 아빠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환희인지 고통인지 모를 표정으로 감격스럽게 구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구유 옆에 앉아 계신 낯선 어른들에게 무어라 인사를 드리는 동안, 나도 구유 앞에 다가가서 구유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 아기였다. 양이 아니라 사람의 아기였다. 사람들이 먹다버린 찌꺼기를 담은 통에, 가축들이 입을 들이대며 배를 채우는 더러운 여물통에, 갓 태어난 작디작은 아기가 강보에 싸여 숨쉬고 있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새끼양을 더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랬구나. 우리는 바로 이 아기를 보려고 그 먼 길을 걸어온 거였구나. 우리에게 바로 이 아기를 보여주려고 그 별이 우리를 여기 데려다 준 거였구나. 이 아기가 모두 기다려온 아기였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천사들이 왔던 거였구나. 마구간에서 낳은 아기, 구유에 누운 아기, 막 낳은 새끼양 같은 이 아기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였구나.
잠시 후에 마구간 밖에서 뭔가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아기를 보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에 밖에 둔 양들이 놀랐는지 잠에서 깨어 매애매애 울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집에 누워 있었다. 아마 구유 곁에서 아기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든 나를 아빠가 등에 업고 돌아왔나 보다. 그러나 아빠는 그 일이 있은 후에 한 번도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굳이 아빠에게 묻지 않았다.
그 날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마을 어귀에 나가서 놀았다. 아빠의 삶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양을 치고, 때로는 전처럼 밤에도 양떼를 돌보러 나가셨다. 그래도 나는 안다. 아빠는 그 날 이후 더욱더 양들을 사랑하고, 아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을. 양들을 돌볼 때마다 아빠가 아련히 꿈을 꾸는 듯한, 아니 꿈을 이룬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 날의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새끼양을 안을 때마다 구유의 아기를 떠올린다는 것을.
그 일이 있은 지 어느새 삼십 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 아기도 서른 살이 넘었을 테다. 그런데 그 아기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아기는 아직 살아 있을까, 그 아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의 마음을 움직여주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