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보다 힘든 것은
2013년 3월 27일, 성주간 수요일
나는 여태껏 유다를 '배반자 가리옷 유다'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냥에 팔아넘긴, 아주 못된 인간,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던 하느님의 실패작,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 가리옷 유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내내 유다를 묵상하게 한다.
나름 잘 살아보려고 했던 인간,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대신 자신을 선택한 사람.
그래서 2천년 동안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사람.
그런데... 정말 유다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사람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예수님이 가장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그를 배반한 사람이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고 믿었던 친구, 유다였기 때문이 아닐까.
믿지 않았던 사람의 배신은 사실 배신도 아니다.
아예 믿지도 않았는데 배신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정말 믿었기에, 꽉 믿었기에 그 아픔은 훨씬 배가 되었던 것일 거다.
십자가 위에서도 어쩌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 위에 매단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애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반한 유다를 용서하기 위해 애쓰셨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럴 수 있니' 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예수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를 부르짖으셨을는지도 모른다.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느낌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과 다르지 않은 거다.
예수님은 정말 유다를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그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때
죽도록 아프고 힘들셨던 거구나.
예수님도 그걸 용서하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쳤던 거구나.
내가 죽어야만 끝이 나는 용서를 하기 위해,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만 거였구나....
은전 삼십냥, '소탐대실'로 자신을 버린 유다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놀림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죽은 거였구나.
실제로는, 십자가가 힘든 게 아니고
용서하기가 그렇게 힘든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