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살이

생활성서 9월호 원고

종이-배 2006. 9. 1. 20:37

<유산>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종종 당신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제 친할아버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시집오기 전, 가톨릭 신자가 아니셨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 매우 독실하셨던 할아버지는

예비 며느리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요구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 당시 교리책이었던 <요리문답>을 외우고서야

결혼 승낙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시아버지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으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습관처럼 할아버지의 전구를 청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성인보다도 더 가까운 ‘통공’을 느낀다고 하시며,

할아버지가 사신 대로 사시려고 무진 애를 쓰셨습니다.

어머니가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생각하신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서입니다.

그 유서에는, 흔히 유서라면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자손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앞으로 신앙을 잘 지키며 살라는 말씀뿐입니다.

치명하신 선조들을 생각하여 관에는 종이도 깔지 말고,

당신은 연옥의 고통을 마땅히 받아야 하므로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느 수도회의 재속 회원이셨던 할아버지는 유서에 남기신 대로,

검소한 수도복을 입고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서를 손닿는 곳에 두고 해지도록 읽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저는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표양을 따라

남몰래 허름한 수도복 한 벌을 수의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존경해 온 사람처럼 살다가, 그 사람이 떠난 모습처럼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

어머니의 소망이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제게 유서를 남기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섭섭해 하실지 모르겠으나 제가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머니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머니가 제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순교로 지킨 것, 그토록 존경하셨던 시아버지가

유서에 당부하고 또 당부했던 것을 제게 남겨주고 싶으셨겠지요.

순교나 유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 제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

이제는 제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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